“번뇌가 사라진 사람은 잡초가 제거된 밭처럼 시원하다.”
부처님 말씀입니다. 5월 즈음부터는 풀과의 씨름이 서서히 시작됩니다. 작물을 심은 밭은 자라나는 풀을 제거해야 합니다. 잡초이지요. 풀을 제거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저절로 싹 틔운 풀들이 어릴 때 풀을 긁어냅니다. 뿌리째 긁어내지 않아도 금방 말라 죽습니다.
이처럼 밭을 비단처럼 깔끔하게 관리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고랑의 풀을 좀 키워주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풀들은 흙을 부드럽게 갈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질기고 풍성한 풀뿌리들이 흙을 깊고 넓게 파고 들어가 흙을 매어주는 것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풀들을 좀 자라게 두었다가 뽑아주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요즘엔 풀을 잡초로 보지 않고 밭에 심는 작물과 같은 풀로 보기도 합니다. 들판에 풀들이 서로 다투어 자라듯 작물과도 자연스러운 경쟁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작물도 덩달아 기를 써서 더 굳세게 자란다는 원리입니다.
풀 관리와 부처님의 번뇌 관리
밭고랑의 풀들은 이런 방법으로 관리하지만, 산과 들의 풀들은 뽑거나 적당히 억제하며 관리하기가 힘듭니다. 요즘은 제초제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올봄 오디나무 밭에 억센 풀들을 잡아보려고 자운영 씨앗을 한 포대 사서 잔뜩 뿌려보았습니다.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는데도 자운영은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뿌렸어야 하지 않았나 하고 아차 싶습니다. 자운영이 다른 풀들을 제치고 밭을 장악하면 관리하기가 훨씬 편리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잔꾀를 부렸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들판의 풀들은 예초기를 사용해서 잘라주어야 합니다. 크고 연한 작물이 들판을 덮고 있으면, 그리고 자운영처럼 퇴비용으로 제격인 풀들이라면 작업하기가 훨씬 쉬우면서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억새나 칡넝쿨 같은 것들은 쳐내기에 좀 골머리를 앓아야 합니다. 이런 풀들은 한번 치고 돌아서면 금방 또 자라나는 듯해서 농부의 마음을 지치게 합니다.
어렸을 적엔 밭을 모두 호미로 매었습니다. 요즘에는 엉덩이 작업 방석이 있지만, 그때는 모두 쪼그리고 앉아서 매었습니다. 상일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을 제일 야물게 하는 상일꾼이 가장 풀이 무성하고 거친 맨 바깥쪽 밭고랑을 매면서 나갑니다. 그러면 길이 트이는 것이죠. 이제 전체 밭을 맬 요량이 다른 일꾼들에게도 생깁니다. 그래서 다 같이 힘을 내서 한 고랑씩 자신 맡은 고랑을 매면서 전진해 나갑니다.
제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호미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집 주변과 텃밭의 풀을 하염없이 매고 계셨지요. 아버님께서 살아계실 적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풀을 맬 때는 매야할 풀들을 보지 말고 내가 매고 지나온 뒤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비추어본다면 번뇌가 무성한 앞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제거되어 시원하게 된 뒤를 돌아보며 힘을 내라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밭일하다 보면 실로 말끔하게 풀이 제거된 밭고랑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뿌듯합니다. 그런 기분으로 눈앞의 장대한 풀들을 매면서 나가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장차 이 풀들을 다 매면 이 밭이 모두 시원해지리라는 원력이 생기는 것이겠지요.
마음과 관계의 관리
풀을 관리하는 방법이 여럿이듯 우리 마음과 관계들을 관리하는 방법도 여럿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잡초가 싹을 틔우는 초기에 긁어 없애듯이 마음과 관계에 어떤 ‘이상 신호’가 들어오는 순간 바로 제거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불편하거나 억울한 감정이 한참을 무르익도록 살살 구슬리며 한동안 자라게 했다가 고름이 터지듯 한 번에 근원을 도려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무거운 스트레스를 그보다 더 큰 기쁜 일들로 주저앉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들녘의 풀처럼 근원을 뽑아 없애기 어려울 때는 자랄 때마다 여러 번 잘라주어서 억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매년 느끼는 것이지만 풀은 잡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작물처럼 어디서 키워진 것을 옮겨 심은 것이 아니라 제 땅에서 제힘으로 자라난 놈들이니 생명력이 질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놈들은 땅속에 가만히 숨어 있다가 자라기 좋은 조건이 되면 갑자기 여기저기서 자라나 지난해와는 전혀 딴판인 풀밭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러니 풀과 대결하고 씨름해서는 아주 피곤해집니다.
풀은 늘 자라나는 것이므로 우리도 그때그때 풀을 맬 생각을 하는 게 좋습니다. 풀이 많이 자라니 싫다고도 하지 않고 풀이 잘 뽑히니 좋다고도 하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뽑을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번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찌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날이 많겠습니까? 그저 일어날 때마다 하염없이 제거해가면 부처님 말씀처럼 잡초가 제거된 밭처럼 시원한 상태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풀은 그런 의미에서 잡초라고 해서는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모두 원래부터 풀이었던 것들이었을 테니까요. 마치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씀과도 같이….
윤남진
동국대를 나와 1994년 종단개혁 바로 전 불교사회단체로 사회 첫발을 디뎠다. 개혁종단 순항 시기 조계종 종무원으로 일했고, 불교시민사회단체 창립 멤버로 10년간 몸담았다. 이후 산골로 내려와 조용히 소요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