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자신만의 철학과 미적 가치를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작가의 시선은 때론 내면으로, 주변의 삶과 세상으로 향한다. 그 시선이 향한 지점에서 화두가 움트고, ‘예술 작품’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 한국화·판화·조각 등 각기 다른 방편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관객에게 선보이는 기회의 장이 바로 전시다. 예술로 발현된 사적이고도 섬세한 작가의 언어는 전시장에서 관객들과 소통한다. 작가의 작품 세계와 그 작품에 감응한 관객들의 세계는 또 그만큼 확장된다.
불교 철학이 담긴 전통·현대 미술 작품을 선보여 온 붓다아트페어는 작가 개인의 작품 세계를 넘어 우리의 세계를 넓혀왔다.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작가와 작품이 관객을 만났으며, 소통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왔다. 그리고 올해, ‘새로운 미래, 새로운 10년’이라는 주제로 붓다아트페어가 3월 30일부터 4월 2일까지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TEC)에서 그 장을 다시 마련한다. 새로운 10년을 향한 여정, 2023 붓다아트페어에 참가하는 박청용, 윤진초(스튜디오 하심 대표), 최규영 작가를 만나 그들의 작품 세계와 화두를 들여다봤다.
작품의 우연성
박청용 작가는 단순화된 형태로 한지와 캔버스, 먹과 다채로운 물감을 이용해 기도하고 명상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시리즈 첫 작품으로 1만배를 그리기 시작해서, 108배, 3,000배, 10만배 등을 그렸으며 2022 붓다아트페어에 〈팔만사천〉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먹을 흔히 우주의 색깔로 비유하곤 하죠. 무언가 간절히 염원할 때 기도와 절을 하잖아요. 또 자신의 마음을 찾아갈 때도 그렇고요. 부처님은 팔만대장경처럼 수많은 마음이 있다는데, 내가 이걸 다 그리게 되면 뭔가를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8만 4,000배를 한지에 새겼어요. 모든 작업은 결국 저의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나를 더 잘 알고 표현해내야지만 더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을 절하는 사람으로 비유해 형상화하는 박청용 작가처럼, 최규영 작가는 창령사 터에서 출토된 나한상들에서 착안해 작품 활동을 한다. 최 작가는 전통적 도자기 형식을 현대미술 개념으로 변용한 도자조형 작업을 한다. 사용하는 재료는 조형물이 고온의 가마에서 잘 견딜 수 있게 작가가 직접 특별 제작한 점토다. 화학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점토 자체에서 나오는 색상을 그대로 유지해서 작품을 만든다.
“국립중앙박물관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에서 나한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보고 굉장한 위로를 받았어요. 자연재해 때문에 나한의 표정이 사라지기도 한다는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순간적으로 ‘이 나한상들을 점토로 제작하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죠. 점토로 나한을 만들어서 고온의 불에서 소성(燒成)하면 보관만 잘 된다면 몇백 년이 지나도 형태가 잘 보존되고 색상 변화도 없겠다는 가능성도 봤죠. 그런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한 분 한 분 작업하고 있어요.”
윤진초 작가는 종교를 초월한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형상에서 영감을 받는다. 박물관에 소장된 불교 문화재와 전통적인 소재에서 주제를 선정하면 그에 맞춰 다양한 물성으로 작업한다. 작업 방식은 텍스타일과 자수, 리소그래피, 일러스트 등 그때그때 다르다.
“유학 생활을 오래 했는데, 박물관에 가면 나라의 유물마다 고유하면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원형적 느낌을 많이 발견했어요. 한국에 돌아왔을 때 박물관에 소장됐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불교 문화재가 많다는 걸 알았죠. 제 나름대로 이 불상들을 해석해서 색을 입히고 꽃, 하늘 같은 자연물과 콜라주 해서 다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불상마다 표정들이 신선하고 재밌고, 또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거든요. 이런 것들을 우리 일상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싶었어요.”
각기 다른 주제와 소재로 작업하는 세 작가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우연성의 요소가 작품에 담겼다는 점이다. 최규영 작가가 만든 나한상들은 똑같은 표정이 단 한 분도 없다. 점토의 특성상 가마에서 구울 때 불의 영향을 많이 받기에 의도했던 표정이 나오지 않기도 한다. 판화의 일종인 리소그래피로 포스터 작업을 하는 윤진초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디지털 프린팅과 달리 리소그래피 포스터는 매번 찍을 때마다 질감이나 색상 표현이 예상과 다르게 나올 때가 많다. 잉크가 덜 묻으면 좀 흐리게 나오기도 하고 많이 묻은 데는 번지기도 한다.
박청용 작가에게 우연성은 절의 ‘자세’에서 나온다. 작품을 처음 시작할 때, 대개는 왼쪽 상단에서 그리기 시작해 오른쪽으로 순서대로 그려나간다. 초창기에는 제일 처음 그리는 형상과 마무리하는 형상을 의도적으로 반배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요즘 제일 마지막을 장식하는 형상은 하심(下心)한다는 의미에서 엎드린 동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그리는 도중 가끔 마음이 간절해질 때는 오체투지 같은 동작을 넣기도 한다. 순간순간 마음에 충실해서 우연히 그린 개별적인 형상 하나하나가 전체적인 그림에서는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다.
작가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
세 작가의 닮은 점이 또 하나 있다. 깨달음을 위해 정진했던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작가들 모두 자신만의 화두를 붙잡고 수행하듯 창작에 임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들에게는 매번 고질적인 어려움이 찾아온다. 큰 종이 위에 엎드려서 수만 개의 형상 하나하나를 그려나가는 박청용 작가는 늘 만성적인 근육통에 시달린다. 최규영 작가는 항상 시간과 싸우며 고군분투한다. 불에 굽고 건조하는 과정까지 평균 보름 이상이 소요된다는 나한상은 불에 구웠을 때 깨지는 상까지 고려해서 만드는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전시 전까지 관객에게 몇 분의 나한상을 소개할 수 있을지 확답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 활동뿐 아니라 교육과 워크숍 등 다양한 활동을 병행하는 윤진초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윤 작가는 최근 전국 어린이 법회 ‘붓다 만다라 만들기 워크숍’에 독감에 걸려서 못 가게 된 상황을 경험하고 “공덕 짓고 회향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데, 몸 관리를 잘해야겠다”고 느꼈다고. 하지만 세 작가 모두에게 무엇보다 가장 극복해야 할 난관은 이전의 작업을 넘어, 매번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관객에게 펼쳐 보이는 일이다.
윤진초 작가에게는 전통과 현대의 ‘밸런스’가 특히 중요하다.
“부처님의 형상을 현대적인 기법과 새로운 소재들로 재해석해서 창조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단순히 ‘트랜디하다’, ‘예쁘다’ 이런 식으로만 보이지 않도록 경계해요. 단순히 어떤 이미지나 주제에 끌려서 하는 작품보다는, 예경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작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작가들과 소통하고 스님에게 피드백을 받아요. 계속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점검하고 화두로 던지며 물러섬 없이, 긴 호흡으로 작업하려고 노력해요.”
최규영 작가는 국립중앙박물관 나한전이 관람객 300만 명이 넘을 수 있던 이유를 “종교를 초월한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최 작가는 ‘이전의 나의 작업과 창령사 터 나한상 유물들을 넘어서는, 더 따뜻한 위안을 줄 수 있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를 늘 화두로 붙잡는다.
“성인(聖人)을 표현한 전통적인 작품은 비례와 대칭이 딱딱 들어맞아요. 그런데 이분들은 얼굴이며 머리와 몸 크기며 죄다 비대칭이에요. 옆집 아주머니,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해서 꼭 내가 말을 걸면 받아줄 것만 같거든요. 작가로서 이걸 뛰어넘어야 사람들한테 감동을 줄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아류 작가로 남을 뿐이에요. 이게 가장 어렵지만 제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죠.”
박청용 작가 역시 〈팔만사천〉 작업을 하며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작품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비운다는 말뜻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되새기게 됐다고.
“〈팔만사천〉 작업을 할 때, 내가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질문만 오롯이 꽉 차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8만 4,000개의 마음을 구하는 마음만 꽉 차 있었던 거죠. 작품을 끝내고 나서 좀 지나니까 그게 비워지더라고요. 마음 비우고 내려놓으니 여백도 더 잘 그리게 되고요. 여백을 진짜 알고 넣는 것과 모르고 넣는 건 다르니까요. 2022년에 청주에서 ‘나를 찾아서 20년-박청용전’을 열었는데, 〈팔만사천〉을 전시하면서 그 옆에 똑같은 크기의 빈 종이를 함께 걸었어요. 제목도 여백으로 비워 놓고요. 그때 중학생이 했던 말이, 저 여백이 신의 한 수라고(웃음).”
붓다아트페어만의 특별함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을 한 세 작가는 붓다아트페어가 다른 전시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작품만 갤러리에 넘기는 게 아니라 부스를 어떻게 꾸릴지 기획하고 운영하며 관객과 가까이 만나서 소통하고 판매하는 일까지 작가 본인이 모두 도맡아서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붓다아트페어에 여러 번 참여한 선배 작가의 조언도 듣고, 관객들에게는 작품 방향성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는다. 그래서 이번 붓다아트페어가 더 기대된다고.
“붓다아트페어 관객들이 주로 수행하는 스님들이나 기도와 절을 많이 해보신 분들이니까 자기 마음을 투영해서 제 작품을 더 깊게 봐주세요. 거기에서 가장 큰 힘과 응원을 받아요. 행하고 보시하는 작품을 계속해서 그려나가야겠다고 다짐하죠. 앞으로도 그림으로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기도를 대신해주고 싶어요.”(박청용)
“‘부처님의 가르침이 친절하고 무겁지 않다’는 걸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요. 특히 좀 더 ‘영(young)한’ 관객들에게 작품이 더 가닿았으면 해요. 젊은 사람들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불교를 끌어나갈 분들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BAF 청년 작가 공모전 작품들도 기대가 되고요. 얼마만큼 지금의 시대와 소통할 수 있는가가 저한테는 가장 중요해요. 그분들이 집에 제 작품을 걸었을 때 무겁지 않고 편안하면서, 수행할 때는 도반처럼 함께하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윤진초)
“집에 가나 작업실에 가나 나한분들이 많아서 항상 절 지켜보고 계셔요. 그래서 작업을 게을리하지 못해요(웃음). 매 순간 맑은 정신으로 저를 돌아보며 사람들이 더 따뜻한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가고 싶어요. 앞으로도 붓다아트페어에서 관객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저 역시 같이 성장해 나가고 싶어요.”(최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