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래(善來, Ehi), 비구(比丘, Bhikkhu)!”
“어서 오라, 선한 자여.”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고 난 뒤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처음 다섯 수행자에게 법을 설했을 때 꼰단냐에게 한 말씀이다. 가장 먼저 깨달음을 얻고 출가하고자 한 벗을 반갑게 맞이하는 붓다의 마음이 ‘선래(善來)’라고 표현된 것이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거문오름의 한 자락인 이곳에 모던한 건축디자인과 차밭이 아름다운 보리도량 ‘선래왓’이 있다. 선래왓은 ‘절 사(寺)’ 자 대신, 사원이라는 의미에서 앙코르와트의 ‘Wat(와트)’를 따왔다. 밭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인 ‘왓’을 의미하기도 한다.
포털에 장소가 등록되지 않아서 제주공항에서 내비게이션에 ‘선래왓절 전기차충전소’로 입력해서 찾아오는 길. 얼마나 보물 같은 곳이기에 이다지도 감춰 놓았는지, 선래왓 주지 오성 스님을 만나면 물을 참이다.
우리의 제주 ‘아란야’
건물 밖으로 바람이 거센 걸 아는지 모르는지 1층 중정 연못에서 잉어들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다. 선흘리 지역은 산간 기슭이라 일조량이 적고 눈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 이를 피할 수 있는 처마가 긴, 회랑식 정방형의 길을 건물 안에 냈다. 어느 때고 천천히 걸으며 명상에 잠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중정 연못에 반사된 햇빛이 실내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창도 길게 냈다. 우연히 선래왓으로 발길 닿은 여행객들은 중정을 거닌 뒤, 자연스레 중정 옆 차실로 향한다. “이곳은 찻집입니까?”, “갤러리인가요?”라고 스님에게 묻기도 한다고.
“얘기를 걸어오면 얘길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구태여 먼저 말을 걸진 않아요. 본인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이곳에 올 때는 자신만의 목적이 있겠죠. 필요하다면 내가 몇 마디 말을 좀 거들 수는 있지만, 쉼과 성찰을 통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일상에 도움 되는 걸 찾는 게 중요하겠죠. 네이버 지도 등록은 업체에서 몇 번 찾아왔는데 조용히 지내고 싶어서 사양했어요(웃음).”
제주 태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절에 다닌 오성 스님은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관음사 조실 우경 스님의 상좌로 제주 김녕 백련사에서 출가했다. 해인사 강원과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경전을 배우고, 해인사와 법주사 승가대학에서 강의를 맡아서 했다. 하동 쌍계사, 금정 범어사, 미얀마 마하시 명상센터 등에서도 수행하다가 제주로 돌아와 김녕 백련사 주지로 주석했다. 스님의 마음수행 산문집 『길은 언제나 내게로 향해 있다』의 말마따나 오랜 시간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고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서다’가 이곳에 걸망을 내려놓은 것이다.
선래왓과의 인연은 20여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 불교사 연구 활동이 전무하던 1994년, 제주 불교 연구모임인 ‘탐라유사(耽羅遺事, 제주불교사연구회)’를 조직했다. 초반에는 제주 시내 건물에서 모이다가 기금으로 이곳 땅을 사서 조립식 건물을 지었다. 점차 그곳은 인연이 된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리는 사랑방이 됐다. 부실한 건물에서 제주의 비바람을 고스란히 견디며 고생하다가, 3년 전 지금의 선래왓 건물을 세웠다.
“건물을 지을 때 비·바람·일조량 이 세 가지를 제일 고려했어요. 또 현대식 건물로 짓되 거기에 불교적 사유를 담아내고자 노력했죠. 사찰들도 많은데 절 하나 더 생긴다고 특별한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시대에 맞는 새로운 형태로 지으면서 건물의 쓰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습니다.
제주에 우리의 아란야(阿蘭若)를 마련해보고 싶었어요. 기존의 제도권 사찰을 벗어난, 마음길을 찾는 곳. 이곳에 와서 편하게 걷고, 쉬고, 법당에 가고 하면서 조금은 위안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죠.”
제주도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유동룡(이타미 준)의 ‘포도호텔’과 ‘수(水)·풍(風)·석(石)뮤지엄’, 안도 다다오의 ‘본태박물관’과 ‘유민미술관(구 지니어스 로사이)’ 등 이미 유명 건축 관광지가 많다. 그런 현대 건축물 사이에서 선래왓 건물은 자못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이곳이 미술관도 호텔도 아닌 사찰이란 점에서 특별해진다. 무엇보다 진리의 마음길을 구하는 이들이 이 공간을 하나둘씩 채워가고 있어서 더 그렇다.
제주 불교 연구모임 ‘탐라유사’
선래왓 2층으로 향하는 좁고 어두운 계단을 “발의 호흡”을 느끼며 한 발 한 발 오르면, 오석훈 화백의 <팔상화평도>를 봉안한 2층 법당이 나온다. 오성 스님이 발행한 「선래왓 팔상화평도」 책자 설명을 빌리면, 붓다의 일생을 여덟 가지 모습으로 형상화한 ‘팔상성도(八相成道)’를 기본 바탕으로 제주 불교의 역사와 민간신앙을 담아낸 탱화다.
<팔상화평도>를 찬찬히 살피다 보면 더욱 눈길이 가는 부분이 있다. 한라산 백록담에 나투신 부처님과 협시하는 문수·보현보살 뒤로 목에 염주를 걸고 좌선하는 처사(處士)와 그 옆에서 기도하는 한 스님의 모습이다. 억불 시대였던 조선 후기에 훼철된 제주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헌신했던 재가자와 스님을 상징한다. 또한 갓난아기를 안고 눈밭에 쓰러져 죽어가는 젊은 여인의 모습은 군경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스님을 비롯한 제주 4·3 희생자들을 기린다. 제주 근현대사의 슬픔과 아픔을 잊지 않고 화폭에 세심히 녹여낸 것이다.
오성 스님에게 단절된 제주 불교의 역사를 잇는 일은 일생의 화두였다. 제주 4·3 사건과 한국전쟁으로 훼손돼,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 제주 불교 문화재를 복원하기 위해 탐라유사 도반들과 수없이 답사를 다녔다. 2004년에는 제주도민들의 증언을 채집해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 - 제주도편」을 펴내고 세미나를 열었다. 그렇게 제주 불교의 근현대사를 조명하며 비어 있는 부분을 하나씩 채워 나갔다. 함께한 벗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 불교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 이 시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라고 여겼습니다. 중앙에서 과제를 풀어가는 방법도 있지만, 지역 사회에서 헤쳐 나가서 좋은 모델로 남았으면 했어요. 근대 불교 이후로 관음사는 천태종이든 태고종이든 종단을 떠나서 제주인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에요. 제가 관음사에서 하려 했던 일이 좌절되고 한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 시간을 보내며 ‘인연만큼, 내가 걸을 수 있는 만큼, 내가 나눌 수 있는 만큼 그렇게 가면 되는 거지 외부적인 성과를 보이는 일에 집착할 필요는 없겠구나’라고 느꼈어요.”
우리가 잘 모르는 제주
오성 스님의 하루, 일주일, 사계절은 특별할 게 없다. 봄과 가을에 100일 기도를 하고, 초파일이 가까워지면 찻잎을 수확해 주변 지인들에게 조금씩 나눠준다. 탐라유사 도반들과 수요일마다 모여서 “그날 합의되는 대로” 오름이나 바닷가를 걷기도 한다.
“여기 사니까 할 일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혼자서 조금씩 짓기 시작했던 농사가 보살님들이 참여하고 힘에 부치면 또 거사님들이 함께하다 보니까, 지금은 2,000평 가까이 돼요. 예전엔 대부분 억새밭이었던 이곳에 차밭, 배추밭이 생겼어요. 이제는 제법 빈틈이 없죠(웃음).”
스님과의 차담이 끝나갈 무렵,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 하나를 꺼냈다. 제주가 관광지화되면서 너무 상업적으로 변질했다고 생각하던 중에 스님의 책에서 ‘사람들은 꽃의 생식기일 뿐인 꽃을 선물하며 좋아한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꽃에 ‘아름다움’이라는 상(想)을 부여해서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처럼, 제주는 육지부 사람들의 상에서만 ‘여유와 힐링의 섬’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장소를 상실한 도시인들이 이상화해 놓은 공간으로 말이다. 이따금 여행하면 좋겠지만, <제주도의 푸른 밤> 가사처럼 마냥 외롭고 지쳤을 때 떠나는 천상의 낙원만큼은 아니었다. 대중매체에서 만든 힐링이니 뭐니 하는 과부하된 수식어와 끊임없는 관광지화와 젠트리피케이션이 이 섬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를 연구하고 제주에서 일상을 보내며 살아온 스님의 ‘제주’가 궁금했다. 제주에 대한 낭만이 없어진 나의 ‘제주’와는 다른 ‘제주’일 것 같았다.
오성 스님은 “제주를 방문하는 외지인, 제주의 문화·역사·신화 등을 정리하는 내지인이 그동안 분리돼 있었기 때문에 이런 지적들이 나오는 것”이라며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 자꾸 뭔가를 새롭게 만들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오히려 제주를 더 해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남방에서 영향받은 설문대할망 같은 신화나 당(堂) 문화들은 허무맹랑해서 잘 안 다가올 수 있겠지만, 재밌기도 하고 또 우리 앞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을 수 있다”면서 “이런 것들이 잘 정리돼서 공유되면, 제주를 더 새롭게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섬세하지 않으면 잘 안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제주가 섬이니까 바다를 찾는데, 이런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제주 들에서만의 느낌이 있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너른 들 같은 오름에 한 20~30분 걸어 올라가면 멋진 풍광이 멀리까지 펼쳐져요. 또 바람의 느낌과 햇살의 느낌, 또 비 오면 비 온 대로의 느낌들이 있거든요. 마치 좋은 책은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나는 것처럼요. 제주도도 한 번 오고 두 번 오면 더 좋아질 거예요.”
“저야말로 제주를 잘 모르고 있었네요.” 멋쩍어하며 선래왓에 오는 사람들이 제주를 어떻게 느끼고 돌아갔으면 하는지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렸다. 그러자 스님이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몸이나 마음이 지치면 제주 시내에 사는 이들이 선래왓으로 한 번씩 찾아온다. 그런데 스님이 차밭에서 일하고 있으면, 바로 얘기를 못 나누니까 장갑을 끼고 와서 어설프게 일을 돕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일하다가 옷에 흙이 묻으면 땀까지 흘려가며 더 열심히 집중한다. 일을 끝낸 뒤 “차나 한잔할까요?” 하고 권하면 “스님, 시간 돼서 갈랍니다. 뭘 얘기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해결됐습니다” 이런단다.
“그러니까 그 얘기는 본인이 고민하고, 본인이 답을 찾았다는 거잖아요. 마음길은 그 마음길을 아는 본인만 갈 수 있지 내(스님)가 동행할 수는 없어요. 제가 일방적으로 인생은 이런 거야 하기에는 그의 마음을 제가 다 알 수는 없는 거잖아요. 각자 다른 문제를 안고 오는 거고, 또 각자의 상태가 있는 거고요. 그렇게 ‘내가 나의 삶, 그 길 위의 주인공이구나’를 스스로 확신했으면 좋겠어요.
때로는 우리가 바람이나 햇살에 위안받기도 하고 더울 때는 내리는 비에 위안받기도 하듯이, 다만 스님의 역할은 비나 햇살이나 바람일 수는 있겠죠. 스님은 단지 그것의 하나일 뿐이지 정작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이는 본인 스스로라는 걸 기억하세요.”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