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동백꽃과 푸르른 차밭이 펼쳐지고, 가을에는 산사를 물들인 단풍이 꽃무릇과 함께 붉은 융단을 깔고, 겨울에는 소복이 쌓인 눈이 눈꽃을 피우는, 사시사철이 아름다운 고창 선운사. 이곳에는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특별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원장스님과 함께하는 잊혀진 차를 찾아서’라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곡우(穀雨)를 앞둔 4월 초순, 선운사 템플스테이 원장 도완 스님(동운암 주지)이 안내하는 잊혀진 차 한잔의 이야기와 차 한잔의 자유를 찾아 나섰다.
“여러분이 곧 차입니다”
‘구름[雲]에 머물며 선정[禪]을 얻는다’는 절 이름처럼 선운(禪雲)사의 아침 운무가 고즈넉한 정취를 한껏 자아냈다. 이른 아침, 극락교에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하나둘 모였다. 이날 차 한잔의 여행을 떠나는 참가자들은 모두 세 명. 다 함께 안개 낀 재배 차밭을 지나, 선운사 암자 동운(東雲)암으로 향했다.
동운암 동다원에서 도완 스님이 차 한잔을 나눌 벗들을 반갑게 마중했다. ‘다선일미 수행원 동운암’은 사계절 내내 차 향기가 가득한 곳이다. 스님은 1만 3,000평(42,975m2)의 야생·재배 차밭에서 직접 농사지어 수확한 찻잎으로 산사에서 내려오는 전통 제다(製茶)법 차를 만든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잊혀진 차’를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일환으로 스님이 직접 구상한 프로그램이다. 일반적인 템플스테이 ‘차담’과는 조금 다르다. 인문학 관점에서 차를 탐구하고, 야생차밭을 포행하고, 마지막으로 스님이 제다한 차 한잔을 직접 음미해보는 특별한 체험 과정이 포함돼 있다.
“여러분은 일주문을 넘었을 때, 이미 차(자연)가 됐습니다. 단지 도시에 살다 보니까 잘 느끼지 못했던 것뿐이에요.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게 차의 본모습입니다. 오늘 직접 야생차밭이 있는 숲속을 걸어보면서 스스로 차가 되어 보세요. 또 자연과 차와 내가 하나가 된 그 느낌을 이후 마시는 차 한잔에서도 온전히 느낄 수 있는지 체험해 보고요.”
간단한 다식에 곁들어 차를 마시며 스님의 차 강연을 들은 뒤, 본격적인 차 여행에 나섰다. 동운암 뒤편의 숲길을 따라 오르자 이내 햇살을 머금은 싱그러운 야생차밭이 펼쳐졌다. 참가자들은 4월 초순 여리게 돋아난 차 새싹에 가까이 다가섰다. 봄 햇살을 찾아 돋아난 찻잎의 생명력을 직접 더듬어 보고 향을 맡아본다. 도완 스님은 “햇볕이 하루 최대 3시간 넘게 비치지 않는 음지야말로 차나무가 자라는 최적의 입지 조건”이라며 “땡볕에 심어진 차나무에서는 결코 좋은 차가 나올 수 없다”고 설명했다. 스님의 말대로 재배 차밭의 누렇게 뜬 찻잎들보다 이곳의 찻잎이 더 새파랗고 강인해 보였다.
“여러분이 찻잎을 봤을 때의 이 느낌을 차로 만들었을 때 주지 못한다면, 그 차는 죽은 차예요. 자연 속에서의 이 찻잎과 제다 후 한 잔에 담긴 차가 일치했을 때 진정한 차가 되는 거죠. 우리가 도시에서 마시는 차는, 이러한 자연을 느낄 수 없을 때 그 자연을 옮겨다 담은 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익어가는 차 한 잔
포행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차 맛을 느끼기 위해 동운암 다실로 이동했다. 다실에는 차를 끓이고 마시기 위한 온갖 다구와 함께 제다한 찻잎을 시기별로 보관하는 옹기가 진열돼 있었다. 도완 스님은 출가 후 차에 관심을 가지고 중국 차를 비롯해 각국의 차를 섭렵하며, 우리 산사에 전해지는 전통 ‘자연숙성차’와 ‘전차(錢茶)’를 복원해냈다. 형태의 모양을 따서 ‘다선산차(茶禪散茶)’, ‘다경원차(茶經圓茶)’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님이 복원해낸 전통 산사 제다법의 가장 큰 특징은 “전혀 불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경원차의 제조법은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찻잎을 채엽해 그늘에서 잘 널어 말리는 ‘시들이기’를 한다. 잘 건조된 찻잎을 천에 싸서 멍석 위에서 둥글리며 빨래하듯 비벼 상처를 내는 ‘유념(涑捻)’ 후 돌절구에 넣고 짓이긴다. 찧은 찻잎을 동전모양의 틀에 넣고 압축해 떡 모양의 덩어리 차로 만든다. 이를 통풍이 잘되는 공간에서 말린다. 다선산차는 딴 잎을 자연 건조시켜 옹기에 담아 1년, 3년, 5년, 10년 숙성시킨다. 이렇게 제다한 찻잎을 보관하는 차 항아리가 300여 개에 이른다.
차는 판매하지는 않고 오직 문화포교를 위한 방편으로 ‘잊혀진 차’를 찾으러 오는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에게나, 초등학교나 다도예절기관에 교육용으로 제공한다. ‘교육’과 ‘보시’가 스님이 차를 만드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스님들이 만들어 먹던 그 방법 그대로를 1995년에 복원했습니다. 전혀 불을 대지 않고, 오로지 자연을 이 안에 옮겨 담아서 그대로를 우려냈을 때, 진정한 대자연의 차가 됩니다. 차가 익어가는 모습은 스님이 참선하는 모습과 똑같아요. 1년, 3년, 10년 수행하면서 도를 깨우쳐 가는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단계별로 다른 맛을 내요. 처음엔 풋풋한 맛을 내다가 점차 가을의 맛을 내고 결국에는 오랜 익어감에서 나오는 깊은 맛과 함께 진향(眞香)을 내게 돼요.”
도완 스님이 3년 발효된 찻잎을 한 주먹 쥐어 다관에 가득 담았다. 스님이 내려준 차에서는 정말 가을이 느껴졌다. 맛도 향도 색도 오색찬란한 단풍잎처럼 다채롭고 고왔다. 차가 익어가듯 한 잔, 두 잔, 차를 마시는 참가자들의 표정도 가을처럼 물들어 갔다.
“차 맛이 완연한 가을의 맛이죠? 입에 머금은 순간 어금니 주변을 자극하고요. 어금니 아래에 침이 돈다는 것은 순환을 시켜준다는 겁니다. 순환한다는 것은 자연에서 막 사람이 태어났을 때의 그 건강한 느낌으로 돌려준다는 거예요. 차는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면서 건강한 차여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 있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세척해 주는 이 차가 곧 자연이자 힐링이죠. 내가 곧 이 차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소통과 배려의 차 한 잔
도완 스님이 ‘잊혀진 차를 찾아서’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유는 참가자 100명 중 단 한 명만이라도 진정한 차 맛을 알고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 마음이 닿아, 2023년 9월쯤에는 동운암 주변으로 녹차 생태체험 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다. 야생차밭 둘레길과 함께 앉아서 차를 즐길 수 있는 정자도 만들 계획이다. 스님은 벌써 정자 이름도 다 지어놨다. ‘도솔정’, ‘백로정’, ‘다선정’, ‘선운정’. 많은 이들이 차 속에 대자유가 있음을, 차가 쉼이자 곧 자연이고 힐링이라는 것을 느꼈으면 한다. 무엇보다 차를 함께 마시며 소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겨울에는 식으면 안 되니까 깊은 잔을, 여름에는 빨리 식혀서 먹기 좋게 넓은 잔을 주죠. 차라는 대자유는 차를 마시는 다구에 배려가 존재할 때 비로소 완성되죠. 자유를 느낀 사람만이 상대방도 자유롭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배려할 수 있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소통이 점점 가로막히고 있어요. 친구, 부모, 직장 동료들 간에 서로 벽을 쌓고 대화가 단절돼 가죠. 이럴 때 ‘차나 한잔할까?’ 하며 대면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자리가 필요해요. 차야말로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소통의 도구가 되어줄 겁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