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불교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지 벌써 4년이 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해가 지날수록 할 이야기는 줄어듭니다. 명상반을 하면서도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는한 할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머리에서 글을 짜내는 대신 영화 스님의 “사십이장경 강설”의 내용을 인용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불교 수행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영화 스님은 불교 수행이란 짐을 가볍기 하기 위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마음은 늘 즐거움을 원하고 추구합니다. 그래서 욕망은 수행을 방해합니다. 예를 들면 명상하려고 앉았는데, 일어나고 싶습니다. 또는 움직이고 싶습니다. 다리가 풀고 싶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은 욕망과 집착의 결과물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원하는 것 즉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반면에 출가자들은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줄이고자 합니다. 진정 필요 없는 것에 대한 욕구를 점차적으로 차단하면서 욕망을 줄여나갑니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 출가했을 때, 되도록이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들도 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물건을 사지 않고도 해결되는 일은 많습니다. 개인 돈으로 물건을 사서 절에 보태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건 좋지 않습니다. 또는 스님이 재가자들에게 넌지시 절에 뭐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만들거나 물건을 사도록 유도해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망을 줄일 기회를 잃습니다.
사실 요즘 절에 대중이 계속적으로 늘어나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면서 물건을 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오늘 사십이장경 강설을 읽어보니 마음속으로 늬우쳐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교훈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욕망은 사랑의 더 거친 형태입니다. 욕망은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사람 간의 유대감입니다. 사랑은 성적 욕망과 정서적 사랑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 둘은 모두다 매우 끈끈합니다. 육체적 사랑은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시켜서 지치게 하고, 정서적 사랑은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평균적인 사람에게 사랑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 인간의 고유 권리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탐구하는 것은 행복을 탐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비참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성적 만족은 우리 인생 중 가장 놀라운 일 중 하나 아닌가요?
하지만 출가자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묶어서 끊임없이 생사의 바다를 윤회하게 하는 근본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을 끊는 것입니다. 출가자는 사랑의 포기를 선택합니다. 배우자, 연인, 자녀, 부모, 이웃,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우리 출가자들은 사랑할 자격이 있고, 사랑할 수 있지만,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잘라냅니다. 출가 후에도 해탈을 얻을 때까지 모든 류의 사랑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 출가자들이 사랑을 포기한다고 너무 이상하고, 나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출가는 거대하고 관대한 사랑을 위해서 작고 나만을 위한 사랑을 희생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길입니다.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합니다.
현안(賢安, XianAn) 스님
2012년부터 영화 선사(永化 禪師)를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2015년부터 미국에서 명상을 지도했다.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 후 스승의 지침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정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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