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여(藍輿)를 멘 승려들
조선 후기에 산수 유람은 크게 유행했다. 특히 금강산 유람의 대열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금강산을 비롯한 각지의 명승지에 대한 시와 기행문, 그림이 홍수를 이뤘다. 유람 무리 중에는 고령자도 있었고, 장기간 먼 곳 여행을 감행한 이들도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유람객들은 사찰을 산수 유람의 거점으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유람을 위한 노동력으로 승려를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로승(指路僧)’이다. 지로승은 산길 안내 역할을 맡은 승려를 말한다. 이들은 유람자들을 산중 곳곳의 명소로 안내했다. 산길 안내는 금강산과 같은 볼거리가 많은 탐승지에서는 필수적이었다. 유람자들은 이들 승려에게서 길 안내를 받고 그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지명과 지명의 유래 등을 유람록에 기록할 수 있었다.
승려들은 승경(뛰어난 경치)에 대한 안내와 더불어 특수한 교통수단을 제공했다. 조선시대 여행 기록에서 ‘남여(藍輿)’, ‘견여(肩輿)’, ‘담여(擔輿)’라는 단어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은 단순한 형태의 가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특히 산을 여행할 때 쓰였던 교통수단이다. 산에서 이 가마를 메는 이들은 승려들이었다. 가마를 메는 데 동원된 승려를 ‘남여승(藍輿僧)’이라고 불렀다.
박제가(朴齊家)는 그의 묘향산 여행기인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1769)에서 가마의 재질과 구조, 안전한 운행 방법을 설명했다. 가마의 띠는 삼으로 엮어 만들고, 멍에목은 등나무를 휘어 만든다. 운행에 있어서는 앞사람은 끌고 뒷사람은 따라가며 앞이 들릴 때는 앞을 낮추고 위로 들고, 숙일 때는 앞을 들고 뒤를 낮추는 방법으로 안전을 도모한다고 했다.
가마를 짊어지는 데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어깨가 필요했다. 두 사람 어깨만으로 긴 여정을 온전히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교대를 위한 예비 가마꾼도 함께 움직였다. 따라서 사대부 여행객 수에 비례해 몇 배의 남여승이 동행하게 됐다.
남여승이 특히나 눈에 많이 띈 곳은 금강산이었다. 몇몇 이들은 금강산에 남여가 등장한 시기가 1572년 금강산을 찾은 양사언(楊士彦)부터였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6세기 초반 주세붕(周世鵬)이나 이황(李滉)의 기록에 이미 견여가 등장했다. 소백산에 올랐던 이황은 “말에서 내려서 걷다가 다리가 떨리면 견여를 탔으니 번갈아 가며 그 힘을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실로 산을 유람하는 묘한 방법이요 명승지를 구경하는 좋은 기구였다”며 견여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이렇게 남여가 산행에 이용되기 시작한 16세기 초는 연산군과 중종 대 승단이 무너지고 폐불 위기를 맞았던 시기다. 16세기 중반 문정왕후에 의해 일시적으로 승단 재건의 기회를 맞았지만, 왕후가 죽자 불교에 대한 유생들의 비판이 심하게 들끓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람을 위해 동원되는 남여승의 등장과 확산은 하락한 불교의 위상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남여승의 존재만으로 불교세의 하락과 승려의 지위 전반을 단정할 수는 없다. 16세기 후반 청허 휴정(淸虛休靜)과 사명 유정(四溟惟政)과 같은 고승이 출현했고 사찰에서 수많은 불서가 간행된 것은 이 시기 조선 불교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승단은 출가로 이뤄진 종교 공동체이기도 했지만, 승단 내부 구조에서는 양반에서 노비까지 출가 시점의 다양한 신분 체계가 그대로 작동하기도 했다. 승단에는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불서에 통달하거나 승직을 소지한 상층 승려들도 있었지만, 승군·의승으로 동원되거나 가마를 메는 승려들도 존재했다. 따라서 일부 승려의 모습으로 당대 승단의 형편과 불교세를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사찰별로 권역을 나누다
16세기 초 기록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남여승은 17세기 이후 더욱 확산했다. 유람객들은 출발할 때 나귀나 말을 타고 이동해 사찰 입구에서 미리 준비된 남여로 갈아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승려들을 동원한 남여의 이용은 유람자의 연령과 체력의 한계로 제한됐던 이동 범위를 크게 넓혀 줬다. 김창흡(金昌翕)이나 권섭(權燮) 같은 이름난 유람가들이 노년기에 산수 유람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 남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오랜 기일이 소요되고 명승지가 산재한 금강산의 경우 남여 이용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유람객들은 일반적으로 내금강(內金剛)의 입산 기점인 장안사에서부터 승려들의 남여를 이용했는데, 18세기에 들어서는 단발령에서부터 가마를 이용하기도 했다.
1711년 그려진 정선(鄭敾)의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도판 1]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금강산 유람의 초입인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조망하는 유람객을 그렸는데, 바로 곁에 민머리 승려들과 남여의 모습도 함께 묘사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여 운행이 빈번해지고 운행 권역 역시 넓어졌던 것 같다.
이러한 남여의 운행은 승려 노동 특유의 조직적이며 효율적 체계를 보이기도 했다. 남여 운행 권역을 분담하는 방법으로 승려들은 사찰별로 운행 구역을 정하고 내·외금강산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운용했다. 내금강에서 남여는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승려가 주로 맡고, 외금강에서는 유점사 승려가 주축이 됐다.
비로봉으로 산을 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내금강에서 외금강으로 혹은 외금강에서 내금강으로 이동할 때 이용했던 통로는 내수점 고개였다. 따라서 내수점을 경계로 내금강 승려들과 외금강 승려들이 나뉘어 남여를 운행했다.
윤휴(尹鑴)가 1672년 금강산을 유람할 때 목격한 것은 내수점에서 50, 60명의 유점사 승려가 일행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정시한(丁時翰) 역시 내수점을 넘으면서 가마를 멘 표훈사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고개 위에서 가마를 멘 유점사 승려들을 맞이했다. 또한 외금강에서 유람을 시작할 경우 백천교까지 말을 타고 갔다가 가마로 갈아타거나, 여행을 마치고 나서 가마에서 내려 말이나 나귀로 갈아타는 환승 풍경이 벌어졌다.
“가마를 멜 유점사 승려 10여 명이 백천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말을 두고 다리를 건너 암석 사이를 건너 암석 사이에 거닐고 맑은 물에 발을 씻었다.”
- 신즙(申楫), 「유금강록(遊金剛錄)」(1627)
이러한 모습이 그대로 그림으로 묘사된 것도 역시 정선의 <백천교(百川橋)>[도판 2]란 작품이다.
<백천교> 왼쪽 하단에는 승려들이 가마를 놓고 대기하고 있고 오른쪽에는 하인들이 말인지 나귀인지를 모는 모습이 묘사됐다. 남여의 환승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왼편의 인물들은 흰 베로 만든 챙이 넓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데 모자를 벗은 이들의 민머리에서 이들이 승려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즙의 유람록에 따르면 승려 무리는 아마도 유점사 승려들로 추정된다. 나무에 상반신이 가려진 승려들까지 포함하면 13명 이상의 인원이 가마 4개 정도를 운행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여 운행의 실상이 사진으로 찍힌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금강산에서 보이는 각 사찰의 남여역 분담은 다른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전남 순천 조계산의 경우 동쪽 사면과 서쪽 사면에 각각 송광사와 선암사라는 거찰을 끼고 있는데, 두 사찰 중간 고개를 경계로 가마 운행이 분담됐다는 구전이 전해 오고 있다.
이렇게 유람객 수가 늘고 남여 운행 요구가 증가하자 산내 사찰들은 남여 운행의 범위를 설정하고 권역을 나눠 일을 조직적으로 분담했다. 또한 남여를 메는 것에도 승려들 사이의 숙련도에 따라 등급이 있었고, 체급에 맞춰 일을 분담했다. 유람객을 감당하기 위한 승려들의 조직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남여승들의 고된 승역
승려들의 남여 운행은 고행이 아닐 수 없었다. 사대부들의 여행 기록에서 위태로운 산길에서 힘겹게 가마를 운행하는 승려들의 고행과 위험한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마를 타고 가니 승려들이 땀을 줄줄 흘렸다. 한쪽 어깨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5리를 가다가 바꾸기도 하고, 2~3리를 가서 바꾸기도 하였다.”
- 신즙, 「유금강록」(1627)
“여기를 지나니 산세가 점점 높아지고 길 또한 미끄러웠으므로 남여를 메는 승려들이 10보에 한 번씩 미끄러졌다. 그래서 늙은이는 옆에서 거들고 장정은 뒤에서 밀게 한 다음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 김창협(金昌協), 「동유기(東遊記)」(1671)
“길이 봉우리까지 나 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험준했다. 승려들이 다섯 발짝 가다가 한 번 쉬며, 목구멍에서 큰 나무를 베는 소리가 나는데 그 모습을 보니 측은하다. 산 정상을 지나는데 길이 또한 경사지고 지세가 수직으로 내려와 남여가 앞은 낮고 뒤는 높아서 떨어질 것만 같아 위험과 공포를 심하게 느꼈다.”
- 이하곤(李夏坤), 「남유록(南遊錄)」(1722)
이인상(李麟祥)은 1735년 눈 쌓인 태백산을 유람하기 위해 각화사에서 새벽에 출발하면서 남여 두 대를 멜 승려 9, 10명을 선발했다. 겹옷 한 벌만 입은 이들이 얼어 죽을까 염려하면서 남여를 운행하는 어려움을 “급한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다”고 묘사했다.
남여역은 국가가 공인한 승역 체제 내에서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잡역의 하나로서 지방 군현의 관리나 사대부가의 사적 동원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람하는 사대부와 그를 위해 노역하는 승려라는, 유불의 사회적 위상이라는 극단적 대비가 드러나는 잡역 중 하나였다.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과도한 남여역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원성이 높아졌다. 균역법 시행 이후 출가 승려가 줄고 환속 승려가 늘어나면서 18세기 후반 이후 전반적으로 승려와 사찰 수가 감소했다. 이에 따라 남여역에 동원될 수 있는 승려 수 또한 감소하면서 남여역의 노동 강도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승려들이 극심한 남여역에 대해 느꼈을 고충과 유람객에 대한 원한은 조선 말에 만들어졌을 ‘금강산 만폭동 가마꾼 중과 악독한 관리’라는 전설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전설의 내용은 거만한 관리가 금강산 유람을 하면서 표훈사 남여승들에게 무리하게 길을 재촉하며 만폭 동행을 요구한 것으로 시작된다. 전설 속 두 명의 승려는 “남여 메다가 지쳐 죽느니 차라리 함께 떨어져 죽는 것이 낫다”며 진주담 폭포에 가마와 함께 몸을 던져 관리와 목숨을 버렸다.
이러한 괴담이 횡행할 정도로 날로 심해지는 고충은 남여역의 폐단에 대한 시정 요구로 이어졌다. 승려들의 남여 혁파에 대한 요구와 그 응답은, 전국의 주요 사찰들이 관부로부터 내려받은 공문서인 완문(관아에서 발급한 증명·허가 문서) 중에서 다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반복된 요청과 그때마다 내려진 완문들은 남여역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이름 없는 남여승, 어떤 이들이었을까?
최근 학계에서는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활발하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를 폐불의 시대로 단정하거나 승려의 지위가 팔천(八賤, 천역에 종사하던 여덟 천민) 중 하나였다는 설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게 지적됐다. 이에 따르면 조선시대 불교는 선(禪)과 교(敎)가 조화를 이루며 사상적 진전을 이뤘고 왕실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차원에서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승도는 호적에 등재되는 등 공민으로 인정됐고, 승역 역시 국역 체제 내에서 관리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숭유억불 시대로 통칭하던 조선시대 불교의 역동적 이미지가 생성되고 있다. 하지만 개별 사찰에서 승도의 구성과 역할 분담, 사찰 내의 생활상, 승도의 사회경제적 존재 양태와 관련된 구체적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남여승에 대한 관심과 연구도 많지 않다.
조선 후기 여행 인프라의 주축을 이뤘던 그들, 유불의 극단적 접촉면을 보여주는 그들, 승단 내 다수를 차지하지만 이름 없이 잡역승이라고 후대에 통칭된 그들은 대체 어떤 이들이었을까.
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금강산 여행, 근현대 불교사, 불교구술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 쓴 논문으로는 「조선후기 승려의 금강산 유람록 연구」, 「1932년 통도사 김구하의 금강산 여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