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소는 매우 상서로운 이미지다. 경전에서는 ‘소[牛]’를 최상의 해탈이나 경전으로 비유한다. 뛰어난 사람을 표현할 때도 ‘소’에 빗댄다. 당나라 대에 들어 선사들의 선문답에는 소를 ‘잘 길들여 번뇌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송나라로 접어들어 소를 인간의 번뇌 측면에 두고, 소를 잘 길들이는 수행 과정 단계를 묘사한 그림이 발전했다. 선자(禪者)들을 위해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북송시대, 소를 주인공으로 여러 종류의 십우도·심우도(尋牛圖)·목우도(牧牛圖) 등이 등장했다. 이후 남송시대로 접어들어 ‘곽암의 십우도’가 나왔다. 곽암선사는 송대 임제종 양기파 스님이고, 법명은 사원(師遠)이며, 대수 원정(大隨元靜, 1065~1135)의 법맥을 받았다. 곽암은 청거 호승(淸居皓昇)의 목우도(牧牛圖)를 참조해 10장의 십우도송을 지었다. 동아시아에서는 곽암선사의 십우도가 가장 많이 유통됐으며, 우리나라 법당 벽화에 곽암의 십우도가 압도적이다.
십우도 대신에 말을 묘사한 십마도(十馬圖)가 있으며, 티벳에서는 코끼리를 묘사한 십상도(十象圖) 등이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십우도 이외에는 다른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이 글은 소를 배경으로 한 곽암선사의 십우도를 중심으로 다룬다.
‘소’의 상징과 의미
필자는 ‘stay foolish’라는 말을 좋아한다. 한눈팔지 않고, 꾀부리지 않으며 우직하게 한길로 나아가는 진실한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서다. 여기서 우직하게 한길로 간다는 것은 소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또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라는 말처럼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나 장인 정신에 소를 비유하기도 한다. 이렇게 세간에서 소는 신뢰를 상징하는 우직한 동물이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농업 문화로 사람들과 가장 밀접한 동물이 소라고 본다.
세간에서 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더 살펴보자. 인도인들은 소에 대한 예찬이 지극하며, 신성시한다. 뛰어난 사람을 표현할 때도 ‘소’에 비유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 전 성씨가 ‘고타마(Gotama)’인데, 이는 ‘최상(最上)의 소’를 상징한다.
다음은 중국의 예다. 중국 도교의 시조가 노자이다(도교 사찰과 승려가 있지만, 중국에서 도교는 종교가 아닌 문화로 간주된다). 중국인들은 노자가 죽었다고 하지 않고, ‘소를 타고 함곡관(函谷關) 너머로 멀리 사라졌다’고 하면서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여긴다.
중국에서는 위대한 사람을 묘사할 때도 소에 비유한다. 당대 조사선의 개조(開祖)인 마조(馬祖, 709~788)도 그의 전기에서 “소처럼 걷고 호랑이처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우행호시牛行虎視)”고 묘사했다. 『대지도론』에서 제시한 부처의 32상(부처님 몸에 있는 특징)에 포함되지 않지만, 우행호시는 성자를 지칭한다. 또한 남악 혜사(南嶽慧思, 515~577, 천태지의의 스승)의 전기에서도 그를 “소처럼 걷고 코끼리처럼 바라보았다(우행상시牛行象視)”고 묘사하고 있다.
십우도 등장과 선어록에 나타난 ‘소’
십우도는 12세기 이후 남송시대에 유행한 것이다. 하지만 소(번뇌)를 주인공으로 하는 내용(마음 다스림)은 당나라 때, 선사들 어록에도 등장한다. 두 가지 선문답을 소개하기로 한다. 마조(709~788)의 제자인 석공 혜장(石鞏慧藏)은 사냥꾼 출신이다. 출가해서도 수행하는데, 여일하게 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루는 석공 혜장이 공양간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마조가 와서 물었다.
“무엇을 하느냐”
“소를 돌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돌보고 있느냐?”
“한 번이라도 미망(迷妄)에 떨어지는 일이 있으면 단번에 코끝을 잡고 끌어당깁니다.”
“너는 소 기르는 법을 잘 알고 있구나.”
이 선문답은 석공 혜장이 소를 돌보는데, 미망에 떨어지면 코뚜레를 잡아당기는 것으로, 번뇌를 잘 다스리고 자신을 살피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유사한 선문답이 또 있다. 백장(百丈, 749~814)선사와 그의 제자 서원 대안(西院大安, 793~883)선사 이야기다. 대안이 백장 문하에 처음으로 찾아가 스승 백장에게 물었다.
“제가 부처를 알고자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부처입니까?”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과 같구나.”
“그런 줄 알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다.”
“처음과 마지막에 어떻게 보림(保任)해야 합니까?”
“소치는 사람이 막대기를 들고 소를 감시해서 남의 밭에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무엇이 부처냐?’는 제자 대안의 질문에 스승 백장은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바로 이런 선문답이 당나라 때에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로 접어들어 깨달음의 여정 그림과 게송이 발전된 것이다.
십우도의 줄거리
곽암 십우도의 전체 줄거리는 마음(번뇌)을 소에 비유해 번뇌를 조복(마음을 굴복시킴)받고 길들여(목우牧牛),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는(기우귀가騎牛歸家), 결국 소도 잊고 자신도 모두 잊어버리는(망우존인忘牛存人) 과정을 지나 해탈한다. 그런 뒤에 회향 정신으로 중생을 제도한다. 이러한 과정을 열 가지로 묘사한 것이다.
깨달음은 순식간에 이룰 것 같지만,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부처님을 비롯해 역대 조사들의 전적(前績)을 귀감으로 삼는다고 해도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들을 위해 깨달음의 과정을 그림으로 보여서 선적(禪的)인 향상일로(向上一路)의 구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십우도다.
십우도 각각을 하나하나 차근히 살펴보자(편의상 이해하기 쉽게 번호를 붙인다).
① 심우(尋牛)
목동이 소를 찾는 모습이다. 본성의 참됨을 잊고 찾아 헤매고 있다. 실은 잃어버린 소도 없는데, 그 ‘잃어버렸다’는 어리석음을 번뇌에 비유한다. 이 말은 본래성불·본각(本覺)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즉 돈오(頓悟)사상으로,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되는데 어리석게도 밖에서 찾고 있음을 말한다.
② 견적(見跡)
목동이 여기저기 소를 찾아 헤매다가 소 발자국을 발견하고, 이를 찾아 나서는 장면이다. 수행자가 수행하는 단초를 발견하고, 참 본성을 찾기 위해 정진하고 있음을 뜻한다.
③ 견우(見牛)
목동이 소의 뒷모습을 발견한 묘사다. 수행자가 깨달음의 근원을 자각해 본성을 보아 오도(悟道)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뜻한다.
④ 득우(得牛)
목동이 소를 발견하고 소고삐를 잡아당기는 모습이다. 수행자가 본인이 본래 성불돼 있음을 알고,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경지에 도입한 단계를 뜻한다. 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니다. 곧 처음 견성(見性)한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⑤ 목우(牧牛)
목동이 소가 날뛰는 습성을 잘 길들이는 모습이다. 앞의 ④득우(得牛)에서 얻은 (견성의) 경지를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진하는 단계로서 보림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고려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선사는 스스로 호를 ‘목우자(牧牛子)’라고 했다. 목우자란 ‘소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지눌선사의 ‘영원히 수행하는 과정의 구도자’로 살겠다는 서원을 엿볼 수 있다.
⑥ 기우귀가(騎牛歸家)
소와 사람이 하나가 돼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부대사(傅大士, 497~569)의 오도송, “빈손으로 호미를 쥐며 걸으면서 물소를 탄다. 사람이 다리를 지날 때 다리는 흐르나 물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한 경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대혜서』 「이보문(李寶文)에 대한 답서(答書)」에 “자기의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안주하는 곳(귀가온좌지처歸家穩坐之處)”이라고 했다. 무자(無字)를 들고 참구하는 그곳이 바로 생사의 번뇌심이 끊어진 당처요, 깨달음의 근원지에 도착한 것을 자기의 본래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는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
⑦ 망우존인(忘牛存人)
집에 도착해서 소는 없고 목동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소는 단지 방편일 뿐이므로 고향에 돌아온 이후, 방편에 마음 두지 않는 것이다. 더 이상 번뇌가 남아 있지 않은 단계로서 평상심(平常心)과 무사(無事)·무심(無心)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단계를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
경지라고 볼 수 있다.
⑧ 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도 소도 모두 잊은 모습이다.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의 경지로서 텅 빈 원상(圓相)만 그려져 있다. 위앙종의 종지 가운데 하나가 원상이다. 또한 신라의 요오순지는 위앙종의 앙산 혜적(仰山慧寂, 803~887)에게서 법을 받아와 원상의 선풍을 전개했다. 이외 조사선 시대 선사들에게서 원상의 선문답이 어록 곳곳에 나타나 있다.
⑨ 반본환원(返本還源)
본래면목의 본 자리로 돌아온 것을 의미한다.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붉게 피어 있는 풍경만이 그려진 모습이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경지로, 여여한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⑩ 입전수수(入纏垂手)
포대화상과 동자가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습이다. 후대에는 행각승이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포대화상은 중국에서는 미륵부처라고 호칭한다. 포대화상은 뚱뚱한 몸집에 큰 배를 내밀고, 늘 웃음을 띠고 있으며, 등에 포대를 짊어지고 있는데 중생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
포대화상은 당나라 말기, 절강성(浙江省) 봉화현(奉化縣)의 승려 계차(契此, ?~917)를 모델로 한다. 계차는 늘 길에서 생활하고, 길에서 잠을 청했으며, 중생들과 저잣거리에서 함께했던 스님이다. 계차가 입멸한 후 중국인들은 그를 ‘미륵의 화신’으로 받들어 희망의 아이콘으로 섬기고 있다. 필자는 포대화상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 비견한다.
십우도를 도표로 만들어보면 이러하다.
십우도 전법 사상의 현대적 의미
수행자가 수행을 시작해서 번뇌를 조복 받고, 해탈을 성취한 뒤에 고요한 경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중생세계로 와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이 십우도다. 현대적인 관점으로 십우도를 살펴보자.
첫째, 십우도는 12세기 남송시대 작품이지만, 근자에도 수행자·명상자들에게 수행 방법의 나침반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20여 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명상이 유행하고 있고, 유행을 넘어 일반화돼 있다. 한편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도 선명상을 보급해 불자나 시민에게 명상 지침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십우도가 수행하는 방법 및 번뇌를 조복하고, 공부를 마친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표본이 된다고 본다.
둘째, 마지막 열 번째인 ⑩입전수수는 깨달음 이후 중생구제를 말하는데, 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성불하고, 첫 제자들인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하늘과 인간 세계에서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해 자유인이 되었다. 이제 유행(遊行)해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법을 전하러 가자. 전도하러 갈 때는 반드시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다른 길로 가서 더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전해야 한다.”(『잡아함경』)
요즘 불교에서는 전법과 포교를 강조한다. 이런 시점에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인 ⑩입전수수는 현 스님들과 불자들이 반드시 새길만 한 내용이다. 그림의 서문을 보면, “표주박을 들고 저잣거리에 들어가며, 지팡이를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술집도 가고, 고깃간도 들어가서 교화를 펼쳐 성불케 한다”고 했다. 곧 중생 구제를 위해서는 수행자가 그 어떤 곳(혹 지옥)이라도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사상은 ‘중생과 함께한다’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고 할 수 있다. ‘화광’이란 자신이 가진 인격적 품성이나 재능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요, ‘동진’이란 오염된 티끌세상에 들어가 그들과 동화돼 함께하는 것이다.
또한 4섭법인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법 가운데 동사섭(同事攝, 중생 속으로 들어가 중생과 더불어 함께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좌선 수행에 대해 설명한 종색선사의 『좌선의』 첫머리에서도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먼저 대비심을 일으켜 서원을 세우고, 삼매를 닦되 중생을 제도할 것이요, 자기만을 위해서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불교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행법으로 한다. 십우도의 ①~⑨ 그림이 자신만의 수행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⑩그림은 타인을 위한 사상이다. 곧 자신의 수행 완성은 물론이요, 타인을 위한 구제도 겸해야 한다는 명상의 표본이 바로 십우도라고 본다.
사진. 유동영
정운 스님
조계종 종단의 교육과 연구를 전담하는 교육아사리, 대승불전연구소장. 1989년 운문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대원사 선방 등에서 안거를 성만했으며, 미얀마에서 1년여간 머물렀다.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년 대학에서 강의했다.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운문승가대학교 명성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경전숲길』·『유마경』 등 20여 권의 저서와 학술 등재지에 40여 편의 논문을 게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