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 창간 50주년] 사람은 모두 부처님(上·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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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 창간 50주년] 사람은 모두 부처님(上·下)
  • 박성배
  • 승인 2024.03.25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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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불광 ④ 1985~1987
동불(東佛)·서불(西佛) | 박성배(뉴욕주립대 종교학과 교수)

 

 인간의 본성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분명히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일체중생이라는 말이며, 중생이란 아직 번뇌와 망상을 여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이란 말은 이와 정반대의 말로서 지혜와 자비로 가득 찬 밝은 존재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어두운 번뇌, 망상 속에도 밝은 지혜와 자비가 들어 있으며, 밝은 지혜와 자비는 어두운 번뇌와 망상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중생과 부처님, 어둠과 밝음, 번뇌망상과 지혜자비는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서 이러한 두 가지의 상반된 것들이 ‘함께 있음(共生)’을 확인하는 것은 부처님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사람들이 사람의 본성이 무엇임을 깨닫고 가장 사람답게 사는 비결이라고 불교도들은 주장한다. (…)

 

선가(禪家)의 신앙고백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신앙고백을 생각해 본다면 이때에 선가의 문제는 중생과 부처님의 공생(共生)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속에 있는 부처님으로 하여금 부처님 노릇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라는 객관적 일반서술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구체적인 ‘나는 부처님이다’라는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발전한다. 

이때의 신앙고백은 ‘나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부처님이 되고 싶다’는 희망사항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라는 말은 화엄의 원융사상에 의해서 이미 자명해졌다. 화엄의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부처님임은 이미 나의 신앙이 되었다. 

 

선(禪)의 혁명적 충격

안타까운 것은 현실의 내가 내 신앙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론상으로 볼 때 내가 부처님임은 틀림없는데 실지의 나는 부처님답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화엄적 신앙의 수준에 편안히 머물러 앉아 있을 수 없는 차원이 선의 차원이다. 

모든 이론적 교육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면서 완강히 버티고 있는 기존의 질서에 선은 혁명적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는 분명히 화룡점정적인 성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점이 바로 선은 화엄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소이이다. 

선을 혁명적인 충격이라 말할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때의 충격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삼매(三昧)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일시적인 충격으로써는 기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혁명은 완수될 수 없다. 오직 삼매의 관문을 통과할 때만이 이러한 혁명은 완수된다. 깨어 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와 꿈도 없이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참선자는 오직 화두의 의단(疑端)만으로 가득 차 있고, 이러한 의단이 외부적 또는 내부적인 어떤 일에 의해서도 방해하지 않을 때 이를 삼매라 한다. 이러한 삼매 없이는 어떠한 사람도 대각(大覺)을 이룰 수 없다고 선가(禪家)는 주장하며 이러한 삼매를 성취할 때 대각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장담한다. 

이러한 자기들의 주장을 밑받침하기 위해서 선가는 또 화엄의 쌍차쌍조(雙遮雙照)와 차조동시(遮照同時)의 이론을 원용한다. 그러므로 선가의 인간관은 모든 사람이 부처님임을 믿기 때문에 화엄교가(華嚴教家)들도 마찬가지로 중생 속에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 속에 중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선가가 화엄교가와 다른 점은 중생 속에 부처님이 있는 경우와 부처님 속에 중생이 있는 경우를 구별하여 양자 간의 차이를 인정했다는 점이다. 모두가 그 말이 그 말같이 들리는 알쏭달쏭한 가운데에 천양지차의 차이를 발견한 것이다.

중생과 부처님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함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생 속에 모든 것이 있느냐, 부처님 속에 모든 것이 있느냐의 차이는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주동이냐, 중생이 주동이냐에 따라서 역사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진다. 원융무애(圓融無碍)를 이론적으로 체계 세우는 데 정신을 쏟은 화엄에서는 이 점이 소홀히 되었다. 

화엄에서는 역사에 대해서 무감각했다. 잘못된 역사의 방향에 대한 개개인의 윤리적 책임이 없었다.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윤리적 결단이 문제 될 수 없었다. 

원융간에서 보면 불(佛)이 중생이고 중생이 불이니 여기에 차별을 두는 것은 미망(迷妄)일 뿐이다. 그러나 선은 달랐다. 부처님 속에 중생이 있는 것은 오(悟)의 세계지만 중생 속에 부처님이 있는 것은 미(迷)의 세계다. 오와 미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양자는 완전 융통이나 미오(迷悟)라는 기준에서 보면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생 속에 부처님이 있는 ‘미’의 세계에서 부처님 속에 중생이 있는 ‘오’의 세계로 혁명적 전환을 해야 한다. 중생 속에 부처님이 있는 미의 세계에서는 중생이 부처님을 제멋대로 채색해 버린다. 

이런 부처님은 중생화(衆生化)된 부처님이다. 여기서의 부처님은 중생에 의하여 과장되고, 오해되고, 왜곡되고, 악이용 당하는 부처님이다. 부처님 속에 중생이 있는 ‘오’의 세계에서는 중생 때문에 부처님은 더욱 할 일이 많아지고 더욱 지혜로워지며 더욱 자비스러워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엄융간에서 말하는 ‘중생 속에 부처님 있고 부처님 속에 중생 있다’는 중성적인 구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중생 속에 부처님이 있는 경지를 벗어나 부처님 속에 중생이 있는 구조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내가 부처님’이라는 선가의 신앙고백 속에서 이를 가능케 하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비록 중생이지만 내 속에 부처님이 있다는 평범한 출발이 나로 하여금 내 속에 있는 중생 편을 들지 않게 하고 부처님 편을 들게 한다. 내 속의 부처님을 확인하는 작업은 꾸준히 계속되어야 한다. ‘나는 부처님’, ‘나는 부처님’… 이러한 계속적인 확인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이 되게 하는 것이며 부처님 속에 모든 중생을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가 ‘오’로 전환하는 모습이다. 

‘나는 부처님’이라는 구호는 부처님을 위한 구호가 아니라 중생을 위한 구호다. 부처님에게는 이러한 구호가 필요 없다. 중생을 위한 이러한 구호에는 일종의 종교적 결단이 들어 있다. 이미 내 속에 부처님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부처님답게 살겠다는 맹세가 들어 있다. 이 맹세는 불교의 사홍서원과 보살의 모든 서원을 그 속에 다 가지고 있다. 이 구호에는 8만 장경의 선지식들의 8만 법문과 보살의 8만 세행(細行)을 모두 다 포괄하는 진언적 성격이 있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무상의 축문이요, 입정(入定)의 만다라(曼茶羅)요, 인간혁명의 탄트라(tantra)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다. 나는 부처님이다. 이러한 말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지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단순한 지적 서술임에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의 믿음으로 될 때 이 말은 즉시 모순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 모순이 발화제가 되고 기폭제가 되어 무서운 힘을 일으킨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자동차에 다시 발동이 걸리는 격이라고 할까. 고목에 다시 꽃이 피고, 죽은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에 비교할 수 있는 큰 사건이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부처님’이라는 말을 하나의 지적 서술로 받아들였을 때 나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더니 이를 정말 하나의 사실이라 믿으니 바로 그 순간 ‘이제까지의 질서 속에 있었던, 묵은 나’는 갈 곳을 잃게 된다. 

당장 지금의 내가 부처님이라면, 지금 내 속에 있는 중생적인 경향들이 있을 곳을 잃고 발광을 할 것임에 틀림없고 이제까지 내가 미워했던 모든 사람이 모두 부처님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이며 지금 내가 싫어하는 모든 사람을 앞으로 모두 부처님으로 모셔야 할 것이니 이것도 큰일이다. 

‘나는 부처님’이라는 믿음을 계기로 ‘미’의 질서가 깨지고 ‘오’의 질서가 새로 세워지려는 일대변동이라 말할 수 있다. 

 

올바른 믿음과 수행

지금 불교계의 일부에서 깨치지도 못한 사람이 부처님이라고 주장하면 사상적인 혼란이 온다고 비판하는 것은 ‘나는 부처님’이라는 말을 지적으로만 다루고 한 번도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관념적인 기우(杞憂)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걱정은 수행적 실험을 해 보지 못한 관념적인 지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며 이런 관념체계는 항상 무너져야 할 구질서(舊秩序)의 아성(牙城)을 이룬다. 신앙과 수행의 동적세계에서는 이러한 구질서야말로 제일 먼저 부서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서짐은 사람들이 ‘나는 부처님’이란 말을 믿음으로까지 심화시켜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이러한 혁명적인 전환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때 오히려 이제까지의 지리멸렬했던 파편 같은 지식들은 개개의 자상(自相)을 고집하지 않고 통일적인 조화를 이루면서 생명의 살아 움직임을 돕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의 깨침은 화엄의 체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

 

*1985년 6·7월호(통권 128·129호)에 실린 박성배의 상·하편 연재 일부를 발췌해 현대적 문법으로 교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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