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의 학鶴이 된 한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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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의 학鶴이 된 한암 스님
  • 효신 스님
  • 승인 2024.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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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스님들의 수행과 사상
한암 스님, 월정사성보박물관 제공

국어 교과서에 실린 스님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봄날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며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밖을 나서지 않은 스님이 있었다. 한암 중원(漢岩重遠, 1876~1951) 스님이다. 

한암 스님이 생소한 사람도 있을 테고, 중장년들 가운데는 국어 수업 시간의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스님의 일화는 손명현의 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 글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1975~1989)에 때로는 수필문 영역에, 때로는 논설문 영역에 실려 한국의 고등학생이라면 어김없이 배웠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된 바로 그 글이다. 여기서 실천의 문제에 대한 물음,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의 실례로 한암 스님(‘방한암 선사’로 나옴)의 일화를 소개한다.

저자(손명현)는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와 상원사 두 고찰에 들렀을 때 월정사는 한국전쟁 중 불에 타 새로 지어져 있는 반면에, 상원사만은 그대로 유지된 연유를 알고 한암 스님을 향한 존경심을 드러낸다.

1951년 한국전쟁 1·4후퇴 때 군은 오대산이 당시 북한군의 거점이 될 수 있다며 ‘군 작전 지역 안에 있는 사찰을 포함한 모든 민간 시설물을 소각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명을 받은 군인들은 월정사와 암자들을 모두 차례로 불태우고 상원사까지 올라왔다. 상원사를 불태우기 위해 서둘러서 짐을 챙겨 떠나라고 하는 20대 초반의 젊은 장교에게 노스님(당시 세납 75세)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서는 방에 들어가서 가사 장삼을 입고 나왔다. 그리곤 법당에 정좌한 채 “이제 불을 지르시오, 그대는 군인이니 명령을 따르는 것이 본분이고, 나는 출가수행자이니 법당을 지키는 것이 본분 아니겠소. 둘 다 본분을 지키는 일이니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라며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장교는 고민 끝에 문짝만 모두 떼어 절 마당에 쌓아 불태운 후, 작전을 수행한 증거로 스님의 깨진 죽비 하나를 가지고 돌아갔다. 이로써 서로가 각자의 본분을 지키며 상원사도 지켜낼 수 있었다. 이 중위(장교)의 신상은 전해지지 않았다. 

스님은 (군인들이 문짝을 태운 바람에) 문에 담요를 두른 방에서, 3개월 후(음력 2월 24일)  가사장삼을 수하고 앉아 입적에 들었다. 이 모습은 열반 직후, 마침 그곳을 들른 김현기 대위(국군8사단, 정훈장교)의 카메라에 담겨 사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평소 스님의 다짐대로 열반에 드신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문하의 스님들이 시절을 걱정하며 스님께 상원사를 떠나길 권유했지만 “앉아서 생사를 맞이하겠다(좌당생사坐當生死)”며 거절했다. 그 이유를 “경에 이르길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면 일체 어려움이 모두 회피한다’고 했는데, 어찌 부처님께서 중생을 속이셨겠는가?”고 밝혔다. 이는 스님들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신도님들에게는 불보살의 위대함을 설하면서 정작 자신도 그런 믿음을 지니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국어 교과서에서는 본분에 신명(身命, 몸과 목숨)을 바친 한암 스님의 거룩한 구도행과 군인들의 인간적인 행동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천의 답으로 드러내고 있다. 

좌탈입망으로 열반에 드신 한암 스님, 월정사성보박물관 제공

 

경봉 스님과 호형호제하다

한암 스님은 한평생 승려로서 본분을 다하고 스스로를 지키며 살았다. 스님은 평생 기본에 충실하며 지냈다. 아침저녁예불에 빠지지 않고 2시간 동안 서서 관음정근을 행했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며, 잠자는 시간 외에는 큰방에서 모범적으로 지냈다. “평생을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수행으로 일관했는데,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정진을 거듭한 분이었고, 무위심의 자비를 실천한 선사였다(김호성, 「한암 선사의 수행론」)”는 평은 한암 스님의 전부를 드러낸다.  

스님은 온양 방(方)씨로 속명은 중원(重遠)이었다. 구한말(1876년 3월 27일)에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원고향은 평안도 맹산군 애전면 풍림리였다. 스님의 조부가 과거에 응하기 위해 화천으로 이사해 새로운 터전을 이룬 것이다. 부친 방기순은 한학자로 천주교 신자였으나, 삼 형제 중 장남이던 중원(한암)과 막내는 스님(법명은 우일愚一)이 됐다.

스님은 21세 때 금강산 유람에 나서 장안사에 머물고 있다가 22세(1897년) 행름선사를 은사로 출가해 평생 본분에 충실하며 소임을 다해 살았다. “이미 머리를 깎고 승복 입고 집을 나와 산속으로 들어왔으니/ 참된 성품을 밝히고,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며, 극락에 왕생하리라”는 출가 시(詩)에 새긴 스님의 마음은 다비 순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1899년(24세) 7월 어느 날, 금강산 신계사 보운강원에서 우연히 읽은 보조국사의 『수심결』 구절에 온몸이 떨리는 감동을 받았는데, 보조국사의 사상은 스님의 수행관으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하룻밤 사이에 장안사 해은암이 전소됐다는 소식에 스님은 무상함이 더 사무쳐 구도행에 박차를 가했다. 1899년 청암사 수도암, 경허 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듣다가 눈이 열리는(개안開眼) 체험을 하게 되자, 경허 스님의 인가(印可, 제자의 득법·설법을 증명하고 허가함)와 함께 그 정진을 이어갔다. 홀로 참선 수행하던 우두암(평안도 맹산군 도리산)에서 어느 날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또다시 깨달음의 시를 읊었다(35세).

“부엌에서 불붙이다 홀연히 눈이 밝아
이로부터 옛길(古路) 인연 따라 청정했네.
만고에 빛나는 마음 달(心月)이여
하루아침에 세상 바람 모두 쓸어버렸네.”

경허 스님은 “한암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며 한암 스님을 귀히 여겼다. 한암 스님도 경허 스님을 존경했지만, 후학들에게 옛 고승의 말을 인용해 “경허 스님의 법화(法化)는 배워도 행리(行履, 행동)는 무턱대고 따르지 말라”고 강하게 선을 그어 당부했다. 본분의 삶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한암 스님으로서는 행리에 대한 경계는 당연했다. 

한암 스님은 여러 스님 가운데 경봉 스님과 서로 호형호제하며 깊이 마음을 나눴는데, 그 시절 형편상 편지로 안부를 전했다. 한암 스님의 편지글은 스님들과는 순 한문체, 거사님들과는 국한문 혼용체, 보살님들과는 순 한글체로 주고받은 점이 특징이다. 

경봉 스님과 법담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한암 스님이 중시한 것은 깨달음의 순간보다 깨달음 이후의 삶이었다. “깨달은 뒤의 조심은 깨닫기 전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깨달을 부분이라도 있지만, 깨달은 뒤에 만일 수행을 정밀히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 여전히 생사에 유랑하여 영영 헤어나올 기약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옛 조사들의 깨달음 이후 수행문을 한두 가지 들며, “행여나 익히 들어서 아는 것이라고 소홀히 하지 마시고 다시 자세히 살피고 거듭 생각하셨으면 합니다(1928년 3월 7일, 문제門弟 방한암 배사)”고 당부했다. 보조국사의 돈오점수 삶이 녹아 있는 부분이다.

 

다섯 가지 덕목

스님의 무위심 자비는 봉은사 조실이던 1925년 7월 8~19일 동안 647명의 사망자를 낸 대홍수 사건 때 널리 알려졌다. 홍수로 떠내려가는 인명을 구하려 하나 거친 물길의 위험 때문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한 사람 구하는 데 쌀 한 가마를 준다”는 스님의 공포로 주저하던 뱃사람들이 몰려들어 708명이나 무사히 구하게 됐다. 

이러한 스님의 자비 경제관은 ‘쥐고 펴는 주먹손’으로 비유된다. 시봉 성관 스님과 함께 강화도 전등사, 보문사 참배길 도중 하룻밤 묵은 부잣집 주인과의 일화에서 나왔다. 집주인은 “스님들은 탁발 나와 늘 보시하라 하는데, 있는 재산을 퍼주기만 하는 게 옳은 건지, 아니면 본인이 가진 재산을 절약해서 늘리는 게 옳은가요?”라며 핀잔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주인어른께서 지금 주먹을 쥔 손을 펼 수 없으면 불구가 되겠지요? 다시 그 손을 오므리지 못해도 불구라 하겠지요? 재물도 이와 같아서 아낄 때는 아끼고, 쓸 때는 제대로 쓸 줄 알아야 옳은 일이 됩니다”는 법문을 남겼다. 

한암 스님의 법문은 현학적이지 않고 언제나 일상의 예시와 경전의 인용구로 간결했다. 상원사의 길이 멀어 신도님들이 스님의 법문을 자주 듣지 못한 것을 한탄하자 “법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신심으로 상원사에 와서 이렇게 만나는 것도 법문이고, 선지식이라고 믿고 생각하는 것도 법문이고, 재수형통하기를 기도하는 것도 법문이고, 모두가 다 법문입니다. 그러니 법문 듣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마세요”라 했다.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되겠다던 스님은 26년 동안 오대산에서 본인과의 약속을 지켰고, 본분을 지키려 신명을 바쳤다. 조계종 초대종정에 추대(1941년)됐을 때도, “중 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하다 하였거늘 나 같은 늙은 중에게 감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며 오대산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산거인(山居人)과 마을 사람의 차이는 채우고 덜어내는 힘에 있다. 마을 사람은 뭐든 채워야 힘이 생기지만 산거인은 비울 줄 아는 사람이 힘을 갖춘 경우다. 산거인은 이력서에 열거사항(스펙)이 텅 비어 있을수록 본질에 충실했음을 보여주지만, 빼곡히 나열함은 여기저기서 헛헛함을 채우려 한 망상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한암 스님은 이 점을 보여준다. 

당시 초대 총무원장 선출에 의논이 분분하자, 스님은 인선 기준으로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했다. “첫째가 신심으로, 믿음이 확고해서 불사에 시작과 끝맺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둘째는 청렴으로, 금전상 과실이 없고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셋째는 인내로, 어떤 어려운 일에 처하더라도 잘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는 배려와 화합으로, 사리가 분명하고 원만해야 하고 대중을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로 겸손인데, 불사 문중에 공로가 많아도 자랑하거나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본을 지킬 줄 아는 이가 총무원장에 적합함을 언급한 것이다. 

궁금하다. 한암 스님의 삶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은 얼마나 있을지, 비록 다섯 가지 덕목은 갖추지 못했더라도 그로 인한 자기 검열로 괴로워하는 이는 과연 몇인지.

 

월조 효신 스님
동국대 강사, 철학과 국어학 그리고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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