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불경(佛經)을 한역(漢譯)하던 초기에는 인도나 중앙아시아 지역 출신의 승려나 재가 신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경전을 번역하는 일이나 발음을 옮겨적는 일, 또는 경전을 베껴 쓰는 일 등의 역할을 했다.
초기에 불경을 번역하는 일에는 최소한 세 명이 필요했는데, 첫 번째는 번역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주역(主譯)’, 두 번째는 원문의 경전을 암기해 입으로 전달하는 ‘전언(傳言)’이 있다. 여기에 더해 구술된 것이나 옮긴 것을 충실히 기록하는 ‘필수(筆受)’가 있다.
이 중에서도 필수는 한자의 서예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번역자가 서로 다른 외국어들을 구전으로 해석하는 반면에 필수의 역할은 말로 번역된 것을 기록해야 했다. 이러한 필수와 관련된 또 다른 명칭이 5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났는데 ‘사경생(寫經生)’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사경생들은 보통 국가의 일을 담당하는 관원이었거나, 일반 개인 필경사들, 또는 불교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유가(儒家)의 문헌뿐 아니라 불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겸비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록 유명한 서예가들은 아니었어도 이들의 서법(書法)은 당대의 서예 스타일을 잘 반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에 중국 땅에 불교가 전해져 역경이 시작될 때 불경을 기록하던 필경사들의 한문 서체는 어떠한 것이었으며, 초기의 불경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제불요집경』 필사본의 발견
20세기 초 방대한 양의 불경 사본이 중국 돈황과 투루판에서 발견됐는데, 이 사본들은 대략 3세기에서 13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이 사본들은 손으로 작성한 것도 있고 인쇄된 것도 있었다. 특별히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들은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종교적 발전에 대한 연구, 한자 서체의 역사적 발전을 이해하는 데에 가치가 있었다.
이 연구를 위해서 필자는 이 필사본들의 목록을 해제해 놓은 여러 학자의 카탈로그를 검토했는데, 이를 통해 기원후 500년 전에 한문으로 작성된 불경 필사본은 최소한 90여 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49종은 작성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49종의 필사본 가운데 『붓다상기띠-수뜨라(Buddhasaṅgīti-sūtra)』, 즉 『제불요집경(諸佛要集經)』은 서진(西晉) 시대인 296년에 작성돼 현존하는 중국 불교 필사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임이 확인됐다. 불경이 아닌 일반 세속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325년 전후 기록된 이백척독(李柏尺牘)의 필사본으로 현재 일본 용곡대학교에 소장돼 있다. 따라서 세속 문헌과 비교해도 『제불요집경』이 가장 오래된 한역 필사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불요집경』의 필사본은 1908년 투루판의 토욕(Toyuq)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1915년 『서역고고도보(西域考古圖譜)』에 기록된 바 있다. 『서역고고도보』는 1902년에서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신장과 감숙, 티베트 등지에 있는 초기 불교 사원지들을 탐사했던 일본 탐험가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가 출판한 것이었다. 오타니는 한자로 기록된 87종의 불교 사본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의 세 차례에 걸친 탐사에서 획득한 많은 문화재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판 1’은 『제불요집경』 필사본의 간기(刊記) 부분을 보여주고 있는데, ‘경전을 296년에 기록했다’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는 법호(法護, 229~306)가 이끄는 번역팀의 일원이었던 축법수(竺法首)의 이름이 보이는데, 그는 필수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이토 신(伊藤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제불요집경』은 중국 중원평야에서 발원하고 확산하기 시작한 시대에 해당하는, 극히 희소하게 남아 있는 서법(書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추측으로 그 필사본은 낙양이나 장안과 같은 도시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투루판으로 옮겨진 것이다.”
『제불요집경』이 법호에 의해 번역됐던 서진(西晉, 265~316) 시기는, 한자가 고대의 형태에서 전형적인 문자형태로 발전하기까지 다양한 발전의 국면들을 보여주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즉 갑골문자, 청동문자, 전서(篆書), 예서(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해서(楷書) 등의 서체들이 기원후 3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완숙된 형태로 변화해 가던 시기였다.
여순(旅順)박물관의 관장인 왕진분(王振芬)은 여순박물관의 수많은 불교 사본들을 검토해 왔는데, 그곳에 소장된 『제불요집경』의 서체와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의 서체를 비교한 적이 있다. 『법구비유경』의 필사본은 전진(前秦) 시대 감로(甘露) 1년(359년경)에 작성된 필사본이었다. 여기서 왕진분은 『제불요집경』의 필체가 종요(鍾繇)의 서체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법호가 『제불요집경』을 필사하는 데 종요의 전형적인 해서체를 사용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 필경사들과 경전의 서체, 그리고 정부의 공식 서체가 만들어진 과정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경전 번역과 종이의 발명, 그리고 서체(書體)의 변화
서진 시대 이전에는 전서에서 예서로 이행하던 시기였다. 국가적 통일 이념하에 진시황은 이사(李斯)를 시켜 각 지방의 문자를 소전서(小篆書)로 통일시킨다. 하지만 이 소전서체는 복잡한 형태였기 때문에 일상생활과 의사소통에 불편함을 줬다. 이로써 더 간단하고 빠르게 쓸 수 있는 문자형태가 탄생한다. 예서(隸書)가 그것이다. 예서는 서한(西漢, 기원전 140~87) 시대에 크게 발전한다. 그 후에 다양한 서체와 유가의 고전들을 편집할 의도로 조정의 대신이었던 채옹(蔡邕)이 후한의 공식적 서체인 한예(漢隸)를 만들게 된다.
한자의 서체는 한대(漢代, 기원전 202~기원후 220)에 이르러 새로운 발전의 시기를 맞는다. 원숙한 예서(隸書)는 동한(東漢) 시기에 이르러 점차 다양한 서체로 발전했는데, 행서, 장초(章草), 정서(正書) 등의 다양한 서체가 등장했다. 이것은 한자 서체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첫 번째 국면으로서, 후대의 서체 발전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 땅에 소개됐기에, 한자의 서체 발전에 불교가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는 아직 해명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한대(漢代)에 서예가 유행하게 된 이유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공직(公職)과 서체의 관계이다. 한나라 때는 학인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는 일이 중요했다. 황실의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에 있어 중국 고전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서예의 기법이 중요한 기준이 됐기 때문이다. 조정은 공직에 있는 사람들을 승진시킬 때 그를 평가하는 체계를 뒀는데, 이때도 서예에 대한 능력은 그 기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을 거치면서 후에 매우 뛰어난 서예가들이 다수 등장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서예가는 장지(張芝)와 종요였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 아래 왕휘지가 등장하게 된다.
서예가들의 등장뿐 아니라, 필기구의 발전도 서예의 단계를 한층 더 고양했다. 한나라 이전에는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기에 비단과 죽간, 목판, 돌과 동판 등에 글을 썼다. 서한(西漢) 시대 초기(기원전 206~기원후 9)에 종이가 발견되면서 중국 서예에 큰 발전의 계기를 만들게 된다. 이때부터 지식인들의 책상에는 장지필(張芝筆, 장지가 썼던 붓의 종류), 좌백지(左伯紙, 좌백의 종이), 위탄묵(韋誕墨, 위탄의 묵)의 세 가지 보물이 놓이게 된다. 기록의 발전에는 서체와 서예가, 그리고 필구들의 발명이 함께 기여했다.
이러한 필경사와 필사 도구들의 발명과 발전, 서체의 통일을 통한 왕실 조정의 노력 등이 함께 어우러지는 여정 속에서 『제불요집경』 등이 번역됐고, 『제불요집경』에서 보이는 현대적 서체가 탄생했던 것이다.
가장 오래된 한역(漢譯) 필사본
『제불요집경』은 292년경 낙양에서 법호가 번역했으며, 296년 축법수가 필사해 복본(複本, 원본을 그대로 베낀 것)을 만들었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 경전의 서체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제불요집경』을 포함해 『서역고고도보』에 기록된 대부분의 필사본은 현재 소실됐을 뿐 아니라, 『제불요집경』에서 보이는 필획들은 분명하게 이미 완숙된 해서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잘 신뢰하지 못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한문 서체의 역사 연구로 유명한 류도(劉濤. Liu Tao)는 그 경전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초기에 만들어진 모조품일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었다. 그는 “돈황 사본들은 정확한 시기를 보여주는 필사본들이 일단 매우 희소할 뿐만 아니라, 서진(西晉)이라고 명시한 간기의 표기도 신뢰할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필체가 너무 현대적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한 일부 유물들이 여전히 뤼순박물관에 소장돼 있었다. 2003년부터 3년간 뤼순박물관과 일본 용곡대학교 도서관은 공동프로젝트의 하나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2만 6,000건의 한자 필사본 파편들을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 결과의 하나로 『제불요집경』의 14개 파편을 새로 발견한 것이었다. 이는 앞서 발견됐던 필사본 파편에서 떨어져나온 것으로서, 1915년 『서역고고보도』에 큰 단편 하나만이 보고돼 출판된 이후 새롭게 발견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발견으로 『서역고고보도』에서 기록된 자료들의 권위가 확증됐을 뿐 아니라 『제불요집경』이 현존하는 가장 이른 한역 불경 필사본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도판 2’는 필사본 파편들을 통해 재구성된 『제불요집경』이다. 왼쪽의 가장 큰 파편은 1915년 『서역고고보도』에 처음 출판된 이후에 소실됐다. 오른쪽의 작은 14개 파편은 뤼순박물관과 용곡도서관이 공동연구를 진행하면서 발견한 것들이다. 이 이미지는 『제불요집경』이 현존하는 가장 이른 한역 불경의 필사본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제불요집경』 필사본의 서체를 둘러싼 논쟁이 남아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왕진분(王振芬)은 『제불요집경』과 『법구비유경』[도판 3]의 서체를 비교해 그 경의 서체가 종요 전통에 속한 것으로 확인했다. 이 서체는 주로 서진 시대의 행정문서들을 기록하는 서체로 자리 잡게 됐다. 이 공식적인 서체가 갖는 권위와 진지함, 그리고 빠른 서법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서체는 정부의 공식문서를 작성하는 데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유가의 고전들이나 『제불요집경』과 같은 불교 경전들을 적는 데 적합하기도 했다.
종요의 서체는 정서(正書, 또는 장정서章程書)
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한문 필체를 만들어가는 초기 시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는 정서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유명했으며, 동한과 삼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그의 서체는 낙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다. 종요의 문체는 정서의 매우 초기 형태를 보여주지만, 아직 완전하게 예서(隸書)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위의 『제불요집경』이 필사됐던 서진 시대는 정서와 행서, 초서가 발전해 가던 과도기적 시대라 볼 수 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서체는 그 목적에 맞게 사용했기 때문에 불교도들도 정서체를 선택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종요의 정서체는 주로 공적인 문서들을 작성하는 데 사용됐지만, 서진 시대의 조정에서는 중요한 문서들을 기록할 때도 이 서체를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종요의 정서체는 서진 시대에 조정의 공식적인 문서를 기록할 때 사용하는 문체로 사용됐다. 공문서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기록이나 문헌도 이 서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종요의 서체가 보여주는 뛰어난 예술적 성취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서체의 등장은 중국 서예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광범위한 영향을 끼쳐 왔다. 정서체가 완성된 시기는 대략 동한(東韓) 시대와 삼국시대 사이로 추정되며, 종요는 이 서체를 극적으로 표현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글. 최중혜
편역. 심재관
최중혜
홍콩대학교 불교연구소에서 미술사학을 가르친다. 런던 SOAS에서 중국 고고미술로 석사를, 홍콩대에서 돈황과 투루판 불교사본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관심 분야는 불교미술과 실크로드의 불교미술과 문화사, 중국서예사, 불교필사본 등이며 아시아 지역에 대한 방대한 현장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