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상절』 책의 형태
『석보상절(釋譜詳節)』은 세종이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편찬한 책이다. 아들 수양대군을 시켜 여러 한문 불교 전적에서 부처님의 일대기와 이와 관련된 내용을 뽑아 한글로 번역하게 한 책이다. 금속활자로 찍어낸 활자본이며 전형적인 옛날 책의 형태다.
세종대왕은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새로 만든 글자를 인쇄하는 방법과 효율적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대해서 많은 고심을 했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책의 형태가 마치 키친타월처럼 둘둘 말려 있는 ‘권자본(卷子本)’이 많이 사용됐다. 하지만 이를 끝까지 보고 다시 처음으로 돌려놓기가 어려워 사용에 불편했다. 권자본 다음으로는 종이를 두루마리처럼 말지 않고 병풍처럼 접어서 사용하던 ‘절첩본(折帖本)’이 많이 사용됐다. 그러나 절첩본도 많이 사용하면 페이지와 페이지를 이어 붙인 부분이 잘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 이후 우리가 옛날 책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선장본(線裝本)’이 등장한다. 즉 끈으로 묶은 부분이 보이지만, 오늘날 책의 형태와 유사하게, 책장을 넘겨서 볼 수 있는 모습의 책이 고려시대 중기부터 사용됐다. 『석보상절』은 잘 만들어진 선장본이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붓으로 글자를 써서 책을 만들었다. 이후에는 나무에 글자를 새겨 마치 커다란 도장이라 할 수 있는 책판(冊版)에 먹을 묻혀 인쇄하는 목판 인쇄술이 등장했다. 목판으로 책을 찍어내는 시대가 온 것이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현재 전하고 있는 세계 최초의 목판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의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 둘 다를 만들어낸 나라다.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조선으로 이어져 『석보상절』에 고스란히 적용됐다. 필자는 학생 시절 『석보상절』을 직접 보게 됐는데, 집에 돌아와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낮에 보았던 책이 떠오르며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윤기가 자르르 흘러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반사되던 『석보상절』의 글자들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과연 이 책이 500년 전, 600년 전 조선시대에 인쇄한 책이 맞는지’ 믿을 수 없었던 그때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 『석보상절』을 공부하면서, 이 책의 인쇄 기술이 좋은 이유가 금속활자 기술이 최고조에 이르러 활자에 맞는 유연묵(油煙墨, 기름을 태워서 생긴 그을음을 재료로 하여 만든 먹)이 개발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유연묵을 사용하면 인쇄된 면이 선명하고 인쇄된 활자가 조명에 반사돼 반짝반짝 빛이 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석보상절』은 갑인자(甲寅字)로 불리는 한글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다. 글자의 모양은 고딕체와 비슷하게 각진 모습이며, 모음의 짧은 획이 둥근 점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월인천강지곡』도 구리로 만든 동일한 금속활자로 찍었다. 이후의 한글 활자들은 모음의 짧은 획들이 둥근 점이 아니라 짧은 직선으로 바뀌는데, 활자본을 볼 때 둥근 점으로 된 모음을 볼 수 있다면 그 책은 틀림없이 옛 책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책이다.
『석보상절』은 전체 24권이다. 이 사실이 지금은 상식이 되어 있지만, 제24권의 마지막 부분 몇 장이 찢어져 있어 그냥 보기만 해서는 그 책이 마지막 권인지 잘 알 수 없다. 필자는 “책이 전부 24권이라는 뜻의 ‘共卄四(공이십사)’가 책 속표지에 감춰져 있었는데, 책을 수리할 때 잘려 나갔다”는 은사님의 말씀을 수업에서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석보상절』은 전체 24권인 것이고 동국대 도서관에 있는 『석보상절』 권24는 『석보상절』의 마지막 책이다.
『석보상절』은 전체 24권 중 현재 권3, 6, 9, 11, 13, 19, 20, 21, 23, 24 총 10권이 남아 있다. 이 중 권3과 권11은 원본인 활자본을 본 따서 다시 목판으로 만든 중간본이다. 원본의 책 크기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인 권6, 9, 13, 19와 동국대 도서관 소장인 권23, 24를 기준으로 보면 대략 세로 22~22.3cm, 가로 15.7~15.9cm이다. 옛날 책은 흔히 글자가 들어 있는 테두리 즉 판광(版匡)의 크기가 중요한 요소인데 『석보상절』의 판광은 세로 21.45cm, 가로 15.9cm이다.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탄생 배경
책의 제목인 『석보상절』의 석은 석가모니의 ‘석(釋)’, 보는 족보의 ‘보(譜)’, 상은 ‘상세하다’의 ‘상(詳)’, 절은 ‘절약하다’의 ‘절(節)’의 뜻이다. 따라서 ‘석보상절’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상세히 써야 할 부분은 상세하게, 간단히 쓸 부분은 원문의 내용을 줄여서 쓴 책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 『석보상절』을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전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석보상절』에는 『법화경』 등의 불교 경전과 녹모부인전(鹿母夫人傳, 마야부인의 전생 이야기) 등의 설화, 또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난 후 인도 전역을 통일한 아쇼카왕에 대한 전기인 『아육왕전』도 실려 있다.
『석보상절』을 제대로 알려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세 문헌 간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는 1446년 죽음을 맞이한다. 세종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둘째 아들 수양대군(나중의 세조)에게 책의 간행을 명령했다. 수양대군은 신미 스님과 그의 동생인 김수온의 자문을 받아, 부처님의 일생을 여러 불경에서 뽑아서 만든 『석가보(釋迦譜)』를 바탕으로 총 27개의 불경, 불전, 사전(史傳), 심지어 논서 등의 불교 문헌에서 뽑아 한문으로 된 책을 만들고 이를 다시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만들었다. 이 책이 『석보상절』이다.
『석보상절』에는 그 이후 간행된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등과는 달리 한문 원문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런데 실제 『석보상절』의 내용을 한문으로 기록된 여러 불경에서 찾아내 비교하면, 『석보상절』이 한문으로 쓰인 경전을 한 글자씩 따라가면서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흔히 『석보상절』은 훈민정음으로 번역된 다른 불경의 언해서(諺解書)와는 달리 의역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직역과 의역의 관점에서 보면 의역된 것은 맞지만, 원문의 한자를 한 글자 한 글자 중시하면서 번역한 문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소헌왕후가 죽은 1년 뒤인 1447년,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지어 아버님인 세종대왕께 바쳤다. 세종은 그 내용을 노래로 지어 불렀는데, 그것이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노래고, 이것을 책으로 만든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라는 책이다. 즉 『석보상절』은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령을 받고 만든 책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아들인 수양대군이 지은 책을 보면서 부른 노래의 가사를 적은 책이다.
『석보상절』이 만들어지고 13년의 세월이 흐른 후, 형님이던 문종이 빨리 죽고 그의 아들인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곧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시키고 조선의 제7대 세조가 됐다.
수양대군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조카인 단종을 귀양보내어 끝내 죽게 했고, 동생인 안평대군을 비롯해 세종의 유훈을 따르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였다. 세조는 이런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배경으로 왕이 됐고, 왕이 된 후에도 성삼문, 하위지 등 단종의 복위 운동을 주도하던 많은 사람을 숙청했다.
왕이 된 수양대군, 즉 세조는 좋은 정책들을 많이 펼쳤지만 장성한 아들인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불행을 겪게 됐고 말년에는 피부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세조는 젊어서부터 불교에 대한 신심이 돈독했고, 말년에는 보다 더 불교에 심취했다. 그런 과정에서 만든 것이 『월인석보』이다. 『월인석보』는 『석보상절』을 뼈대로 만든 책이기는 하나 『월인천강지곡』의 노랫말을 본문으로, 『석보상절』의 내용을 설명문으로 만든 책이다.
책 제목인 『월인석보』의 월인은 ‘월인천강지곡’의 ‘월인’이고, 석보는 ‘석보상절’의 ‘석보’이다. 그런데 『석보상절』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만든 것이 『월인천강지곡』인데, 『월인석보』의 책 제목 ‘월인석보’는 책을 만든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 이것은 『월인천강지곡』은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지은 것이고 『석보상절』은 아들인 세조 자신이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석보상절』과 훈민정음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든 후 이 글자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심이 컸다. 당시에는 전면적으로 한자를 사용했으므로 처음부터 한자를 완전히 배제하고 한글을 쓰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마치 한자와 ‘가나’가 섞여 쓰인 일본어 문장과 같이 우리도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쓸 수밖에 없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따로 만들어 쓰는 알파벳 문자와 유사한 형식이다. 알파벳 문자인 영어는 ‘abc’와 같이 자음 글자와 모음 글자를 한 글자 한 글자 붙여서 쓰는데, 한글을 이렇게 쓴다면 ‘ㅎㅏㄴㄱㅡㄹ’과 같이 적어야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한글을 로마자 알파벳처럼 붙여서 쓰지 않고 ‘한글’과 같이 자음과 모음을 모아서 마치 가상의 네모 칸에 꽉 들여 쓰일 수 있도록 했다. 이는 한글이 한자와 어울려서 쓰일 수 있도록 한 배려다. 이런 배려 덕분에 한글은 세로쓰기도 가능해 서점에 꽂혀 있는 영어책의 제목을 읽을 때 고개를 삐딱하게 돌려야 하는 불편함이 한글책에는 없다.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지어 바치자 세종이 그 내용을 바탕으로 노래로 부른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석보상절』은 한자를 크게 써 놓고 한자의 음을 작은 글자로 붙이는 방법을 채택했다. 한글을 만들면서 한글을 크게 쓰고 한자를 작게 쓰지 않은 점이 이상해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월인천강지곡』을 만들 때는 한글을 크게 한자를 작게 쓰기도 했다.
『석보상절』은 한자를 크게 사용했고, 『월인천강지곡』에서는 한글을 크게 사용했다. 한글을 새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때까지 한자를 주로 쓰던 문화적인 힘과 관습을 즉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자를 주로 쓰던 양반들의 권력은 여전히 강했기 때문에 한글은 1894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인 나라의 글자로 인정받게 된다. 『석보상절』은 한글을 창제한 직후인 1447년에 한글을 사용한 책을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지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도 하다.
『석보상절』의 내용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석보상절』 제1권에는 부처님의 일생을 8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인 팔상도가 있었다. 『석보상절』의 내용은 이 팔상도의 전개 순서와 동일하다.
부처님의 일생을 중요한 장면마다 상징화해 묘사하는 것은 산치대탑 등 인도의 불탑에서부터 보이는 양상이다. 이를 8개의 장면 즉 팔상도로 정례화해 묘사하는 것은 『석보상절』에서 보편화됐다. 그만큼 이 책이 우리의 불교에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석보상절』 제1권에 팔상도가 있지만, 책의 시작은 이 세계가 처음 형성되던 이야기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부터 출발한다.
석가모니의 전생은 선혜(善慧)였고, 부인 야수다라의 전생은 구이(俱夷)였다. 구이는 선혜에게 반해 “이 세상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세상마다 그대의 각시가 되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선혜는 “나는 보시를 즐겨하기 때문에 보시를 위해서는 살과 피, 심지어 자식과 부인까지도 보시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내 뜻을 따르겠다면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제6권에는 부처님이 아들인 라훌라(羅云, 나운)를 출가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야수다라는 라훌라를 데리고 건물 속에 숨어 버린다. 야수다라는 라훌라를 출가시키러 온 부처님의 제자를 향해 “부처님이 나랑 결혼한 후 남편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출가해 버리더니, 이제는 아들까지 출가시키려 하느냐”고 항변한다. 이때 부처님은 제1권에서 나오는 전생 이야기를 하신다. “전생에서 너는 모든 것을 보시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부처님의 말씀에 야수다라는 라훌라가 출가하는 것을 반대하지 못한다.
부처님이 깨닫고 난 직후,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책에는 기원정사(祇園精舍) 설립과 관련된 이야기도 나온다. 수달(須達) 장자는 막내아들이 혼인할 시기가 되자, 한 바라문에게 혼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바라문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호미(護彌) 장자의 딸을 보고 마땅한 혼처라고 생각해 주선한다.
호미 장자의 집을 방문한 수달 장자는 사람들이 잔치 준비를 하느라 떠드는 소리를 듣고 사돈인 호미 장자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호미 장자는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을 바치려고 잔치를 준비한다고 답한다. 이후 수달은 부처님을 자기의 나라에 모시기 위해 부처님과 스님들이 거처할 곳을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기원정사라는 절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기원정사’, ‘기원’, ‘기림’ 등 이름으로 지어진 많은 절을 볼 수 있다.
수달 장자는 절을 지을 수 있는 재산은 있었지만 마땅한 땅이 없었다. 고심 끝에 기타(祇陀) 태자가 가지고 있던 동산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수달 장자는 기타 태자에게 가서 동산을 자기에게 팔라고 했고, 기타 태자는 땅을 팔지 않을 생각으로 이 동산을 전부 금으로 깔면 동산을 팔겠다고 말한다.
수달 장자는 실제로 그만큼의 금을 주어 동산을 사려고 하였는데, 그때서야 기타 태자는 “왜 이렇게 많은 금을 주고서라도 이 동산을 사려고 하는지” 묻는다. “부처님과 스님들을 이 나라에 초대해서 머물게 하려고 한다”라는 대답을 듣고, 기타 태자는 “동산의 땅은 수달 장자가 보시하고 절을 지을 재료로 쓰이는 동산의 나무는 자신이 보시하겠다”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설립된 기원정사의 원래 이름은 ‘기수급고독원정사(祇樹給孤獨園精舍)’다. ‘기수’는 기타 태자의 나무, ‘급고독원’은 수달 장자의 별명인 ‘급고독 장자의 동산’이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석보상절』에는 부처님 제자들의 불교 귀의 장면과 부처님의 전법 이야기가 나온다. 『법화경』 전체가 『석보상절』에 실리기도 했다. 『법화경』에는 부처님이 만년에 영취산에서 설법한 최상승의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석보상절』에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 인도의 아소카왕이 불교를 전파하는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후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고 한국에까지 전파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석보상절』은 부처님의 일생과 『법화경』, 『아미타경』, 『지장경』, 『대방편불보은경』 등의 대승 경전, 「안락국태자전」, 「목련전」, 「녹모부인전」 등의 불교 설화, 『석가보』, 『석가씨보』, 『석가여래성도기주』 등의 사전(史傳)을 망라하는 한글로 된 최초의 작은 종합 불전이라 할 수 있다.
『석보상절』의 이러한 점이 높이 평가되어 일본어로도 전권이 번역됐으며, 최근에는 영어 번역본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다른 문화권 화자들도 원활히 『석보상절』을 읽을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바란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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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림 주해, 『석보상절』 권6,9,13,19권(1959), 동국대학교출판부.
이호권, 「『월인석보』 권두 부속문자와 서지」(2011), 민족문화논총 제48집.
정우영, 「『월인천강지곡』의 국어사적 가치와 문헌적 성격에 대한 재조명」(2014), 장서각 제32집.
김성주
『화엄경』, 『유가사지론』, 『금광명경』 등 고려 시대 각필 석독구결을 바탕으로 고대국어를 연구하고 있으며, 석보상절, 두시언해 등의 역주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