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는 빛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그 빛은 현실에 존재하는 빛, 물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빛이라기보다는 화가의 머릿속에 있는 빛이다.”
- 앙리 마티스
화가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묘사한다. 과연 이 말이 맞는 말일까? 적어도 불교의 유식 전통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식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 즉 ‘오직 식(識)만 있고 대상은 없다’라고 본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은 이 ‘식(識)’의 작용에 의해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식’은 모든 경험과 현상의 근본이 되는 인식 작용이다. ‘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전환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인식하는 나와 경험 세계가 형성된다.
예를 들어, 세잔의 다양한 사과 주제 작품에 등장하는 그 붉은색 사과는 과연 실재하는 사과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세잔은 여러 각도에서 본 사과를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표현한다. 이는 객관적 실재보다는 화가의 지각과 해석을 중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유식 사상이 우리가 인식하는 외부 대상, 즉 사과가 진짜로 있는가 없는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외부 대상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 대상이 우리의 의식과 분리돼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의 의식은 끊임없이 세계를 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세잔이 사과를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다면성을 보여주듯이, 하나의 대상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캔버스에 그려진 사과는 실재하는 사과가 아니라 화가의 의식을 통해 재해석된 표현이다.
이처럼 유식 사상은 우리가 외부 대상에 대해 갖는 집착과 고정관념의 허구성을 드러내 주며,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세계를 구성하고 해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일상적 사유 속에서 ‘사실 혹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여기 자신만의 시각과 관점으로 마치 선사가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듯 마음속 색채를 강렬하고 대담하게 드러낸 이가 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미술이 외부 세계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마음을 돌이켜 들여다보게 만드는 방편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앙리 마티스(Henri Émile Benoît Matisse, 1869~1954)이다.
“스스로 과거 세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젊은 화가는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다.”
- 앙리 마티스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 ‘색채의 마술사’, ‘20세기 최고의 화가’ 등으로 칭송받으며 파블로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한 예술가이자 ‘야수파(野獸派, fauvism)’ 운동의 중심인물이다.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동북부의 르 카토-캉브레지에서 식품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다. 마티스는 파리에서 2년 동안 법률을 공부한 이력으로 이후 변호사의 조수로 일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다. 1890년 맹장염으로 입원 중 소일거리로 어머니가 사다 주신 물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다가 예술의 길로 들어선다.
1891년, 마티스는 파리로 이주해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윌리엄 부그로의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다. 이후 쇠라의 제자인 구스타브 모로의 문하생이 되어 색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는다. 이 시기 마티스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고흐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적 영감을 한층 끌어올리는 계기가 된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마티스는 인상주의와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강렬한 원색과 스타일을 구축해 나간다. 1904년, 마티스는 첫 개인전 개최 이후, 그 이듬해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 <모자를 쓴 여인>(1905년)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바로 ‘야수파’라는 새로운 미술 운동이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 명칭은 호평이 아니라 평론가들의 조롱이었다. 평론가들은 이들의 그림이 마치 야수들이 울부짖는 모습처럼 색채가 요동친다고 비꼬았다. 마티스는 비평가들의 혹평에 시달리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했고, 논쟁이 생겨날수록 더욱 주목받게 된다.
1906년 마티스는 평생의 라이벌이자 친구가 된 피카소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는 확장되고 고유한 스타일은 더욱 견고해진다. 1917년 마티스는 프랑스 남부 니스로 이주하는데, 지중해성 기후와 작열하는 태양 빛 속에서 그의 예술적 영감을 한층 끌어올린다. 이후 그는 점점 더 단순화되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 <춤>(1909~1910년)과 <음악>(1910년)에서 잘 드러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마티스는 중병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 하지만 그의 신체적 제약이 그의 예술혼을 꺾을 순 없었고, 1943년부터 그는 ‘컷아웃(Cut-outs)’ 기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는 색종이를 가위로 오려 붙이는 방식으로, 마티스의 말년을 대표하는 작업 방식이 됐다.
말년의 마티스는 1947년부터 4년 동안이나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 프로젝트에 몰두한다. 성당 예배당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 만들고, 그것을 설치할 건물의 디자인을 하는 일이었다. 마티스 자신이 “내게 그 성당은 내 작품에 헌신한 전 생애의 완성을 의미했다”라고 회고할 만큼, 이 작품은 마티스 예술적 여정의 정점이 된다. 후일 종교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1954년 11월 3일, 마티스는 니스에서 마지막까지 병마와 싸우며 예술혼을 불사르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의 나이 85세였다.
“그저 대상을 복제하는 것만으로는 예술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당신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 일깨우는 느낌, 대상들 사이에 성립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 앙리 마티스
강렬한 색채가 캔버스를 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내린다. 화려하고 커다란 모자챙에는 대담하고 거친 붓질이 방금이라도 지나간 듯하다. 그나마 여인의 선명한 눈썹과 눈동자만이 이 작품의 윤곽을 알아보게 해 줄 뿐, 그 외에는 색채가 모든 윤곽과 경계를 지워버린다. 짙은 초록과 보라, 파랑, 노랑, 분홍색이 서로 뒤엉키면서 여인과 배경도 하나의 평면처럼 느끼게 한다. <모자를 쓴 여인>은 마티스가 모자를 쓴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 아멜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 속에 앉아 있는 아멜리아를 그린 듯 그림 속 색채는 하나같이 강렬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색채의 혁명에 그치지 않는다. 마티스가 사용한 강렬한 녹색, 붉은색, 노란색은 단순히 외부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화가의 내면 의식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티스는 일상적인 색채 인식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내적 진실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녹색 얼굴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있는 그대로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나타낸다. 이는 마티스의 마음속에 저장된 감각과 정서가 캔버스 위에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가 행자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탐구하듯, 마티스는 붓과 물감을 통해 자기 내면을 탐구하고 표현한다.
“색은 단순할수록 우리의 감정에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
- 앙리 마티스
마티스의 색채에 대한 고유한 감성에서 북아프리카 알제리 여행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작업한 <디저트: 붉은 조화 혹은 붉은 방>(1908년)에서 마티스는 색채를 사용하는 대담성이 무엇인지 그 정의를 내리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여인도 아니고 정물도 아니고 배경도 아니다. 강렬한 붉은색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면서 공간을 정의하고, 감정을 전달하며,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주인공이 된다.
마티스는 이 붉은색을 통해 전통적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과감히 무시하고, 색채의 힘만으로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 벽과 선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그림 전체가 하나의 카펫 혹은 태피스트리처럼 보인다. 과일 쟁반을 매만지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하녀>(1657년경)에서 느껴지듯 고요하지만, 고조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테이블 위의 과일 접시와 식탁보의 꽃무늬는 붉은 배경과 대비돼 더욱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대비는 단순히 시각적인 것을 넘어 색채의 정서적,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작품 속에서 붉은색은 단순한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표현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균형이 잡힌 때 묻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사람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그림말이다.”
- 앙리 마티스
<춤(첫 번째 버전)>(1909년)에서는 나체의 사람들이 군무를 추고 있다. 모두가 손에 손을 맞잡고 격렬하게 온몸을 흔들어댄다. 이들은 마치 무녀가 춤을 추듯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있다. 원을 그리는 춤사위 속에 음악이 스며든다. 이들은 빠른 박자와 리듬 속으로 빠져들면서 삶의 고통과 두려움, 갈등 같은 온갖 부정적 에너지를 다 씻어내는 듯하다. 생명의 리듬과 삶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한층 고조된 몰입 속에서 손을 놓쳐 버린 한 여인이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옆 사람의 손을 잡으려 애쓴다. 이들이 추는 춤의 속도감과 경쾌함을 짐작할 수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무리와 하나가 되고 싶어질 정도다.
이제 마티스는 이토록 단순하고 선명한 구도와 색채를 통해 오히려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이카로스>(1946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카로스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다 밀랍으로 만든 깃털이 녹아버려 추락하는 순간이다. 심장을 나타내는 붉은 점이 인상적이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느낌이다. 추락하고 있지만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다. 그 모습 뒤로 마치 불꽃놀이 하듯 별들이 빛나고 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듯 병마 속에서도 마티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마티스는 그만의 색채를 마음속에서 길어 올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봄날의 따듯한 햇살과도 같은 미소를 건네준다. 그의 색채 속에는 그가 전하는 마음이 스며들어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견디라”고 말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