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 대원사 동국선원장 성우 스님
“좋은 씨 뿌리고 좋은 수확을 해라 할 뿐이지,
무씨 뿌린 데, 배추 안 나”
“공부가 허고 싶은데 여자가 공부허믄 집안 망한다고, 경주 김가, 아주 양반이라. 야학을 다녔어, 저 뒷문으로 몰래 가고오고. 선생님이 해인사를 가서 중이 되가꼬 나타났어. 그때부터 나도 절에 가고 싶은 생각이 난 기라. 집이는 저 딴 디로 간다고 써놓고, 쌍계사 국사암으루 갔어요. 붙잡으루 올까봐서, 한 달 만에 계 받고, 사흘 만에 머리 깎고. 콩깻묵하고 썩은 강냉이하고 삶어서 요만한 디다 퍼서 줘, 비구니 회상이 영- 시원찮을 때라요. 그걸 먹고 쪼록쪼록 배를 곯아가믄서 낮에는 산 파고 밭 매고, 밤에는 집안일 허는디두 후회 한 번을 안했어요.”
“그럭허고 살다가 정혜사를 가려고, 다 떨어진 걸망, 그눔 빨아서 그것하고 옷은 칠렁칠렁한 걸 입고, 밀대모자를 쓰고 나서는데 팔일오 해방이 됐는기라. 사람덜이 쏟아져 나오니께 석탄 실쿠 가는 기차, 그 문짝에 매달려서 종일을 갔어. 좋드라고, 세월 가는 줄 모리게. 일엽 시님이 입승하고 그럴 땐디, 저 큰 방에 입승자리, 항상 그 자리 앉아 가지고 입승 노릇을 허는데, 아무리 편찮애두 그 자릴 안 떠나. 그 시님 밑에서 공부를 허구, 만공 시님 날마다 오셔서 법문해 주시구, 아주 재미가 있었지.”
“육이오 뒤에 은사시님하고 여기 들어올 때, 길도 없고 전부 바위널이라. 어디가 절터인지도 모리게 생겼어. 건물이 다 내려앉아서, 거서 다 나무가 나고 엉켜 있응께. 반찬꺼리두 간장 된장두 저 부산까지, 진주까지 가서 얻어가지고 순전히 내 손으루 짊어져다 일꾼들 밥을 하고. 전국적으로 대처승하구 비구승하구 싸울 때거든. 하루 걸러 와서 우리 살림보따리 다 마당으로 끄집어내고. 그래도 꿋꿋하게 잘 싸웠습니다. 대중공사를 해서 그 사람들 설득을 잘 시키고. 만인동참책을 맹글어 가지구 사방으루 댕기구. 그럭해가꼬 이게 이룩된 겁니다.”
“몸땡이라는 건 허망한 거거든, 죽는 거 안 봤습니까? 시간 되면 놔버리는 거라. 그러니께 적당허게, 이 몸뚱이 유지헐 만큼, 창자 마르지 않을 만큼만, 입히고 멕이고. 아, 백 년도 못 가는 눈을 갖고, 옳다 그르다 분별허지. 눈이 그러는 게 아니구, 여기서 주장허는 게 들어서. 그 놈은 불에 태워두 안 태워지구, 물속에 잡어 넣어두 죽는 게 아닙니다. 그 자리를 찾어 내면 아뭇꺼두 논헐 게 없다 이 말이우. 잘하면 네 일이다, 잘못해두 네 일이다, 전부 다 네가 씨 뿌리고 거두는 거다, 그르니 좋은 씨 뿌리고 좋은 수확을 해라 할 뿐이지.”
금강선원 선원장, 탄허불교문화재단 제7대 이사장 혜거 스님
심존목상 눈 가는 데 마음이 간다
탄허 스님은 잠자는 시간, 일어나는 시간이 일생 동안 똑같았다. 오후 9시부터 오전 3시. 60년대 초 비구 대처 싸움 때 청담 스님 등 급박한 논의 중 오후 9시가 되자 잠자리에 들었고, 오전 3시에 깼다. 전쟁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러했다. 난리가 났지만 흐트러짐 없다. 한번은 스승이 영은사에서 대중과 함께 『금강경』을 읽는데 순간 바람이 일어 촛불이 꺼졌다. 이미 경을 모두 외운 대중이지만, 그 순간 경의 합송이 끊어진다. 눈이 가고 마음은 가지 않은 것이다. 유일하게 경을 읽어나간 이가 스승이다.
혜거 스님은 왜 고전인 『도덕경』을 강의하는가. 『도덕경』은 글이 짧고 어렵다. 정밀하고 치밀하게 조직되어있다. 사람이 갖추어야 할 틀, 나라를 다스리는 일 등 대단히 현실적이다. 불경은 현실을 초현실로 접근한다. 그 초현실은 현실의 본래 모습이다. 부처님 명호 열 가지 중에 ‘세간해(世間解)’가 있다. 불경은 현실적이다. 초현실로 착각하면 안 된다. 『도덕경』은 배타성이 없고, 불경을 더 현실적으로 읽을 수 있는 힘을 준다. 불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노자의 세간법은 방편이다.
심존목상(心存目想). 눈 가는 데 마음이 간다. 『원각경』에 나오는 말이다. 공부의 가장 기본이다. 눈이 가면 마음도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헛돈다. 원력과 끊임없는 관찰력. 한 생각을 계속 놓지 않고 끌고 가야 한다. 어떻게 봤는가에 따라 망막에서 보이는 물체와 눈 깊은 곳에서 보이는 물체가 다르다. 껍데기는 소용없다. 더 깊이 반복하면 잠재의식으로 관찰한다. 모든 탐진치가 끊어진다. 의식은 번뇌와 함께한다. 거울일 뿐이다. 이 정도 깊이 있게 공부가 되어야 한다.
선 수행과 그림 그리기, 전각, 시 쓰는 수안 스님
“한반도 모든 백성께 부처님 한 분씩”
옛 어른들은 강원 시절부터 붓을 잡고, 평생을 이어갔다. 그런 기운을 지금은 보기 어렵다. 경봉 스님은 선필(禪筆)이고, 석주 스님의 필력은 따라갈 수 없다. 20대 눈 푸른 수좌 시절에 극락암 삼소굴 경봉 노스님께 전각(篆刻)한 것을 보여드렸다. 노스님은 그 전각을 보고 반신반의했다. 그 전각 속에 당신의 선필이 보인 것이다. 선과 각이 어울리기에는 너무 젊은 수좌였기 때문이다. 이후 “내 도장을 파봐라”는 노스님의 권유로 마음을 일으키고, 은사 석정 스님께서 전각의 대가들을 연결해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문득 거울을 보니, 머리가 새하얗다. 자세히 보니, 돌가루였다. 하루인가, 이틀인가. 툭툭, 머리를 털었다. 각을 할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그렇다. 오롯이 혼자다. 작은 틈이 있으면 쉬지 않고 써본다. 주변 종이 위로 붓이 지나간 흔적들이 쌓여 있다. 잠을 자다가 문득 깨어나면 꿈속에서 떠올랐던 장면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록한다. 쓰고 기록하는 일, 오래된 습관이다. 선화에 쓰인 시구들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도 그러하다.
스님에게는 각(刻), 서(書), 화(畵)를 하는 근육이 있다. 이 근육은 늘 잡아놓지 않으면 안 된다. 각, 서, 화를 악필(握筆)로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힘 때문이 아니다. 원력이다. 마지막 죽을 때까지 놓지 않겠다는 것. 가없는 중생을 기어코 건지겠다는 것이다. 모든 작품에 부처님이 들어간 것도 이런 원력이 바탕이다. 인불(印佛). 스님 이후로 조금씩 사람들이 작품 속에 부처님을 넣기 시작했다. 스님의 원력은 한반도 모든 백성이 스님의 선화 한 점씩, 부처님 한 분씩 갖는 것이다.
*2016년 1·3·9월호(통권 495·497·503호)에 실린 김성동 전 편집장과 최배문 사진작가의 성우 스님, 혜거 스님, 수안 스님 인터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