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전번 시간에 이어서 그 반야심경의 구마라집 번역과 그다음에 그 반야 이연스님이 번역한 것을 같이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번역하는 것으로 반야심경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구마라집의 번역은 다른 건 다 똑같은데요. 하나가 추가돼 있는데 뭐가 추가돼 있냐면 무유공포 원리전도 몽상을 일체 전도몽상 고뇌라고 번역한게 좀 달라요. 그러니까 제가 저번 시간에 설명했는데 보살은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보리살타라 하지 않고 그냥 보살이라고 번역했고 보살은 즉 대승의 수행자는 반야바라 일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심무가애 마음에 뭔가 걸림이 없어요. 걸림이 없다는 것은 신에 대한 걸림이 없다는 말이죠. 마음작용이 신이나 나의 생활을 다 온전히 지배하고 생산해내고 했다고 하는 그 생각으로부터 걸림이 없고 또 걸림이 없기 때문 때문에 공포심이 없는 거예요. 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거죠. 그다음에 자기 생명에 대한 공포심도 사라지는 거죠.
무유공포라는 말은 좀 더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공포라는게 절대로 없고 뭐 이런 말이에요. 여기서는 이제 저번 시간에 설명한 그 일체에 대한 일체에 대한 것들을 조금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구마라집 스님은 일체가 전도몽상이 하는 것을 떠나 일체가 전도몽상의 괴로움과 번뇌라고 하는 것을 떠난다는 의미로 일체전도몽상 고뇌라고 그 표현하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는 일체라고 하는게 그 실제로 존재할 거라고 하는 그 생각인 거죠. 스스로 존재할 거라고 하는 그 잘못된 뒤집어진 꿈 같은 생각이 결국 괴로움과 번뇌를 만든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떠난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생각으로부터 떠나서, 결론은 뭐예요 구경에 도달해야 될 결론은 열반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요. 요거를 똑같이 이제 번역한 것을 다시 한번 내 뒤에 내용은 뭐 같기 때문에 총체적으로 번역한 거를 읽어 보면 보살이 반야 바라밀에 의지함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으며 일체라는 뒤바뀐 꿈같은 상상인 고뇌를 떠나서 끝내는 열반을 성취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한 까닭에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라는 크게 밝은 주문이고 위없는 주문이며 비교할 수 없이 어 밝은 주문이라 능히 일체라는 괴로움을 제거하며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래서 반야바라밀이야 말로 주문이라고 설랬는데 곧바로 여기서 이제 갈제 갈제 요렇게 구마라집 스님이 번역 했는데요.
그냥 뭐 주문은 같은 얘기니까 아제아제 바라아재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주문을 외웁니다. 다 이렇게 그 우리가 해석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사실은 이제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주문이라고 하는 것은 음만 조금만 바뀌어도 음이 조금만 바뀌어도 그 사실 어떻게 되면 어떻게 생각해보면 주문의 효력은 없겠죠.
근데 앞에서는 아제 아제라 그랬는데요. 또 갈제 갈제 그러면은 갈제 갈제하면 효과가 있겠어요. 아제 아제가 효과가 있겠어요. 한번 그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죠. 그래서 저는 즉설주왈이라는 말때문에 이것은 아마 그런 얘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