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산행(東學山行) ① 선운사 비결 사건에 참여한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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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산행(東學山行) ① 선운사 비결 사건에 참여한 승려들
  • 김남수
  • 승인 2024.11.1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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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비결 사건

갑오년(1894)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건이 ‘선운사 비결 사건’이다.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이전 1892년 8월(음력)에 일어난 일인데, 동학도들이 선운사 도솔암 석불의 배꼽에 있는 비결(祕訣)을 빼낸 사건을 일컫는다.

신화적 요소로도 전승되고 있는 이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로 당대에도 이미 알려진 내용이었다. 매천황현(梅泉黃玹)은 오하기문(梧下記文)에서 “그들은 무장(茂長)의 산골 절벽 속에서 용당선사의 예언서를 얻었다. ‘지금은 거사를 할 시기이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며 헛소문을 퍼뜨렸고”라 기록한다. 김재홍(金在洪)은 영상일기(嶺上日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영평 이서구가 완백이었을 적에 이 절에 도착해 돌사다리를 올라가서 열어보려고 하였지만, 바람과 번개가 크게 일어나 실행하지를 못했다. 올가을 동학의 무리들이 이 절에 이르러 100장 높이 절벽에 몸을 움츠리고 올라가서 신서(神書)를 열어보고 갔다. 영평 이서구가 보지 못한 것을 동학이 마침내 본 것은 필시 신기한 일이라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생각하고 추종하면서 오히려 남보다도 뒤쳐질까 걱정했다.”
- 12월 20일

선운사 도솔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 동학도들은 마애불 배꼽 속에서 비결을 꺼냈다. 사진 불광미디어

무엇보다 이 사건에 참여한 오지영(吳知泳)이 동학사(東學史)에서 전후를 기록하고 있다. 오지영의 『동학사』는 1920년대 작성한 ‘초고본’과 1940년 책으로 발간한 ‘간행본’이 있는데, 두 판본 모두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또 하나의 기록으로 당시 천주교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수집 문서에 「동학도개국음모건(東學徒開國陰謀件)」이 있다. (사건의 전개 과정과 사건의 종교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영호와 한승훈의 기록에 정리돼 있다.)

오지영의 『동학사』와 뮈텔 문서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 여러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승려들의 참여 여부와 관련해 중요한 차이를 보여준다. 오지영은 ‘초고본’과 ‘간행본’ 모두에서 사건이 벌어진 날 “승도(僧徒)들을 결박(結縛)해 놓고 석불(石佛)의 배꼽을 떼고 그 비록(祕錄)을 빼갔다”라고 기록한다. ‘간행본’에서는 후에 승도들이 동학에 결합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건 당시를 기준으로 승려들은 사건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학도들에게 결박당했음을 일관되게 서술한다.

반면 뮈텔 문서의 「동학도개국음모건」에서는 승려들이 이 사건뿐 아니라 이후 동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기술한다. 또 참여한 몇몇 승려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에 나타난 승려들 참여 기록을 살펴본다. 한문은 이영호 해석에 주로 따른다.

임진 8월 무장 선운사 상도솔 석불의 흉문(胸門)에서 금은(金銀)을 훔쳐 갈 때, 오태원 오두원 김병일 김수향 오계원의 다섯 놈들이 농간하였다. 300여 무리를 취당하였다. 그때 승도로서 합류한 자(僧徒服心者)는 불갑사 인원(仁源), 백양산 우엽(愚葉), 수연(水演)이다. 금은을 훔쳐 가던 그 날밤 동학배 300여 명 중 포(炮)·장(丈)·검(劍)으로 무장한 자가 20여 명, 그 외는 각각 길이 1척의 목봉을 가지고 어깨 위에 올리고 궁을진(弓乙陣)을 둥글게 짰다. (중략)

예부터 득도한 고승은 진실로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돕는 일에 힘썼는데 어찌 비결(秘訣)을 가지고 나라의 흥망을 논하는가? 대저 불상을 만들 때 흉복 안에는 벽사(闢邪)의 뜻으로 대장경 목록을 써서 넣고 생금은(生金銀) 등 칠보를 깊이 넣어둔다. (중략)

승려된 자는 어찌 대역(大逆)에 빠지고 동학배를 인도하지 않는가? 인원(仁源) 우엽(愚葉) 수연(水演)은 금구원평도회(都會)에 참여하고 긍엽(亘葉)은 보은도회에 투입하였으니 이것은 어떤 곡절인가?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 개국국사(開國國師)로 보운당 긍엽(普雲堂 亘葉), 환송당 인원(幻松堂 仁源), 농은당 우엽(聾隱堂 愚葉)이 적혀 있다.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마지막에 양대인 선생(洋大人 先生, 뮈텔을 일컫는 듯)이 조선 국왕에게 급히 보고하기를 원하고 있다. 문서 앞에는 이 사건 이후 구성될 새로운 정부의 구성안을 기록하는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부 요직과 더불어 개국국사(開國國師)로 보운당 긍엽(普雲堂 亘葉), 환송당 인원(幻松堂 仁源), 농은당 우엽(聾隱堂 愚葉)을 거명한다.

 

네 명의 승려들

「동학도개국음모건」에 기록된 승려는 인원, 우엽, 수연, 긍엽 네 명이다. 이 중 긍엽 인원 우엽은 개국국사로 추대됐으며, 인원 우엽 수연은 선운사 비결 사건에도 참여했고 이후 금구원평도회에 참여했다. 또 긍엽은 보은도회에 투입됐다.

또 다른 정보를 제공하는 데 ‘보운당 긍엽은 경성 밖 북격동에 거하고(居京城外北格洞)’, ‘환송당 인원은 영광 불갑사에 있으며(居靈光佛甲寺)’, ‘농은당 우엽은 본래 백양사에 있다가 선운사로 이전했다(本在白羊山移禪雲奪)’라고 기록한다.

이름

선운사 비결

개국국사

동학 참여

거주처

보운당 긍엽

普雲堂 亘葉

 

기록

보은도회

경성 밖 북격동

환송당 인원

幻松堂 仁源

참여

기록

금구원평도회

영광 불갑사

 

농은당 우엽

聾隱堂 愚葉

참여 기록

금구원평도회

백양사에서

선운사로 이전

수연 水演

참여  

금구원평도회

백양사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는 보은집회와 금구원평집회를 기록한 것으로 볼 때, 선운사 비결 사건 직후가 아니라 1893년 3월 이후 작성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인원 우엽 수연은 전라도 일대 사찰에 거주하면서 선운사 비결 사건에 참여했고, 긍엽만이 경성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학도개국음모건」는 첩보 수준의 문서이고, 새로운 정부의 구성과 개국국사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있어 신빙성을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승려들만 놓고 보았을 때,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세한 기록도 보여준다. 이들 네 명의 승려는 선운사 비결 사건과 동학농민전쟁에 과연 참여했을까?

그들의 참여 여부를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로 당대에 활동했던 승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수연(水演)을 제외하고 긍엽, 인원, 우엽 세 명의 흔적은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동학운동을 다룬 글이나 영상매체에서 이 운동에 참여한 승려는 칼이나 창을 들거나, 혹은 신비적 요소를 지닌다. 이 사건에 참여한 승려들의 흔적을 찾아보면, 무장한 승려 이미지보다는 학승(學僧)의 이미지가 오히려 강하다. 흔적을 통해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승려들의 면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농은당 우엽(聾隱堂 愚葉)

승려들의 호칭은 법호(法號)와 법명(法名), 혹은 자(字)로 구분되는데, 법명은 계를 받을 때 받는 이름이고 법호와 자는 세간의 호(號), 자에 해당한다. 농은당 우엽(聾隱堂 愚葉)은 농은이 법호, 우엽이 법명일 듯하다.

우엽은 선운사 비결 사건과 금구원평집회에 참여했고, 개국국사로 기록됐으며 백양사에 있다가 선운사로 이전했다고 기록된다. 당대에 ‘농은우엽(聾隱佑葉)’이라는 법호와 법명을 지닌 승려가 한 명 확인된다. 다만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에서는 법명이 우엽(愚葉)으로 기록되는데 ‘佑葉’와 ‘愚葉’의 차이가 존재한다.

농은우엽(聾隱佑葉)이라는 이름은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89)이 지은 『선원소류(禪源溯流)』라는 책에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 간 선(禪)을 둘러싼 논쟁에서 설두유형이 백파긍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저술한 책이다. 저술연대는 불확실하고, 1899년 목활자본으로 간행됐다.

설두유형은 지금의 곡성군 옥과면 일대의 옥과현(玉果縣) 출신으로 17세에 장선 백양산(백양사를 일컫는다)으로 출가했다. 설두유형은 백양사와 구암사에서 ‘백파 – 백암’으로 이어지는 법을 이은 것으로 보인다.

설두유형이 저술한 『선원소류』 책 말미에 시주를 담당한 ‘시주질(施主秩)’이 나오고, ‘학회비구(學會比丘)’에 여러 명의 승려와 더불어 농은우엽(聾隱佑葉)이라는 이름이 기명 된다. 농은우엽(聾隱佑葉)이 책 간행 시 설두유형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두유형 스님이 저술한 선원소류 목활자본(1913년 간행본). 학회비구(學會比丘)에 농은우엽(聾隱佑葉)이 적혀 있다. 사진 동국대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선문염송집설화』의 간기 필사(좌)와 『선원소류』의 간기 필사(우). ‘농은거사 김일우(聾隱居士 金一愚)’라는 간행기 위에 金一愚라는 인장도 같이 찍혀 있다. 사진 동국대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또 하나의 책이 있다. 『선원소류』 간행과 같은 해인 1889년 양주 봉인사에서 목활자로 판각되어, 1902년 간행된 『선문염송집설화(禪門拈頌集說話)』란 책이다(중앙승가대 소장). 책의 간행 역시 설두유형과 관련되는데, 책 말미 간행기에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年己未閏七月十九日付於道巖大禪法孫林宗錫聾隱居士金一愚’가 손으로 직접 작성한 필사 글씨가 있다. 같은 필사 글이 1913년 간행된 『선원소류』 (중앙승가대 소장) 책 말미에도 적혀 있다. ‘농은거사 김일우(聾隱居士 金一愚)’라는 간행기 위에 金一愚라는 인장도 같이 찍혀 있다. 판각 시기와 간행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내용의 필사가 적혀 있다.

혹시 ‘농은거사 김일우’는 농은우엽(聾隱佑葉)과 동일 인물은 아닐까? 동일 인물이라면 어떤 이유로 ‘농은우엽’이라 하지 않고 ‘농은거사 김일우’라고 했을까? ‘愚’와 ‘佑’의 차이는 여기서 추론할 수는 없을까? 현재로는 확인할 수 없다.

설두유형은 장성 백양사, 순창 구암사, 영광 불갑사에서 강론을 펼치다 1889년 양주 봉인사에서 선문강회(禪門講會)를 열고, 그해 가을 구암사로 돌아와 입적한 것으로 기록된다. 『선원소류』와 『선문염송집설화』의 간행은 설두유형의 봉인사 시절과 관련이 있다. 농은우엽이 설두유형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에 농은당 우엽(聾隱堂 愚葉)은 ‘백양사에 있다가 선운사로 이전했다’라는 기록했다. 그러면 선운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고창 선운사 입구 부도전에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는 백파긍선의 탑비가 있다. 백파긍선과 초의의순 간의 선 논쟁에서 초의의순의 입장을 지지한 완당 김정희가 지은 글인데, 백파긍선 입멸 후 문도인 백암(白岩)과 설두(雪竇)가 김정희로부터 글을 받아 세웠다. 당시 선운사와 백양사는 백파긍선의 법손(法孫)들이 한편에서 법통을 잇고 있었다.

이 같은 과정을 볼 때, 설두유형의 『선원소류』에 시주질로 등장하는 농은우엽(聾隱佑葉)이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에 등장하는 농운우엽(聾隱愚葉)과 동일인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 없을 듯하다.

 

환송당 인원(幻松堂 仁源)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에 환송당 인원(幻松堂 仁源)은 영광 불갑사에 있다고 기록한다. 당대 환송(幻松)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불갑사에 있었다.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선풍을 일으킨 백학명(1867~1929)의 출가 은사가 바로 환송이다. 하지만 두 명이 동일인인지는 확언하기 힘들다.

백학명은 1867년 영광군 불갑면에서 태어났고, 20세 무렵 부친이 별세한 직후 큰 뜻을 품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도달한 곳이 순창 구암사였다.

순창 구암사(淳昌 龜巖寺)를 당도하였습니다. 마침 설두화상(雪竇和尙) 강하(講下)에 학인 사십여 명이 흑의홍가(黑衣紅袈)로 경전(經典)을 앞에 놓고 엄연히 묵좌(默坐)한 것을 보니…. (중략) 헛되이 해중삼산(海中三山)을 더듬었구나 하야,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와 붓 상자(箱子)와 이연한 후 불갑사 환송장로(幻松長老)를 의(依)하야 출가하고 금화선사(錦華禪師)에게 계를 받으니 계명은 계종(啓宗)입니다.
- 『불교』 제62호, 1929년

정리하면 백학명은 1887년경 순창 구암사에서 설두화상의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서 방황을 끝냈다. 그길로 고향 영광에 있던 불갑사로 향해 환송을 은사로, 금화를 계사로 출가한다. 여기서도 앞서 거론된 설두유형이 백학명과 인연이 있음을 확인한다.

설두유형은 불갑사와도 인연이 깊다. 현재 불갑사 사천왕상은 고창 소요산의 연기사에 있던 것이데, 1876년 설두유형이 불갑사로 옮겨왔다. 당대의 대둔사(현 대흥사) 승려인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1894년 찬술한 『동사열전(東師列傳)』에도 “설두 스님은 불갑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황폐한 사찰의 면모를 일신시킨 다음 용흥사에 옮겨 가서 사찰의 낡은 곳을 뜯어내고 새롭게 짓는 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백학명의 은사로 불갑사 환송(幻松)이 실존했지만, 「동학도개국음모건」의 불갑사 환송인원과 동일인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한자가 같고 시기적으로 가능하다는 개연성만 확인할 뿐이다. 단, 환송과 백학명 역시 설두유형과 어떤 관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백학명은 동학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원불교 개창자 소태산 박중빈과 인연이 남다르다.

설두유형 부도(왼쪽)와 설두유형 탑비
설두유형의 부도는 순창 구암사에, 탑비는 영광 불갑사에 있다.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에 등장하는 네 명의 승려 중 농은우엽과 환송인원에 대해 살펴보았다. 수연은 ‘백양사에 있다’고 기록되지만,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세 명의 공통분모를 찾으면 백양사가 된다. 백양사, 선운사, 구암사, 불갑사의 네 사찰은 동학운동이 크게 일어난 고창과 장성권역에 있는 사찰이고, 당대에 중심은 백양사였다.

또 하나의 공통분모는 설두유형이라는 승려다. 백파긍선의 법을 이은 설두유형은 백양사에서 출가했고, 구암사에서 강론을 펼쳤으며 불갑사 불사를 일구었다. 그리고 완당 김정희에게 글을 받아 백파긍선의 탑비를 선운사에 세웠다.

네 명의 승려 중 한 명, 보운긍엽이 남았다.

 

보운당 긍엽(普雲堂 亘葉)

당대에 보운긍엽이라는 승려가 있는데 의외의 곳에서 만난다. 후에 친일 승려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이 법을 이은 승려가 바로 보운긍엽이다.

『동사열전』에 따르면, 이회광은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설악산 신흥가람의 설허(雪墟) 선사에게 머리를 깎았으며,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모두 배워 더 이상 갈 길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마침내 보운(법명은 긍엽) 선사의 선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라고 기록한다.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에서 보운긍엽은 개국국사로 기록되고 보은도회에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또 ‘경성 밖 북격동’에 있다고 기록해, 보운긍엽은 지금의 서울 어딘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운긍엽은 동학농민전쟁을 전후한 시기 서울 어디에 있었을까? 북격동이 어느 곳을 칭하는지는 모르지만, 보궁긍엽은 선운사 비결사건이 벌어지던 1892년경 서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 봉은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도(三世佛圖)’와 ‘감로도(甘露圖)’에 보운긍엽이 화기(畵記)에 등장한다. 삼세불도는 대웅전 후불탱화로 1892년 제작됐고 감로도 역시 같은 해 제작됐다. 보운긍엽은 삼세불도와 감로도에 기록된 증명 법사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그림을 그린 화승(畵僧)은 아니다. 그에 앞서 제작된 경국사 신중도(神衆圖)의 증명 법사로도 기록된다. 이외의 몇몇 불화에서도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보운긍엽은 건봉사가 주 활동처인데, 1884년 ‘금강산건봉사사적급중창광장총보(金剛山乾鳳寺事蹟及重刱曠章總譜)’에서는 도원장(都院長)으로 기록되고 있다. 1906년 건봉사에서 건립한 봉명학교의 설립에도 관여했고, 조선 왕실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1890년을 전후로 일정한 직위와 권한이 있는 승려로 판단되는 보운긍엽이 어떤 연유로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에서 개국국사로 기록되고, 또 보은도회에 투입되었다고 기록됐을까?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굳이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자면 이회광이다. 친일 승려로 활동하기 전 이회광은 강백(講伯)으로 이름났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이회광을 강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동사열전』에서도 “회광 스님이 강당을 개설하고 설법을 시작하니 양서(兩西)와 삼남(三南) 지역의 학인들이 무명의 숲을 헤치고 불조의 가풍을 우러러 몰려 들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글을 기록하는데, “스님은 오대산과 건봉사에 머물기도 하였고, 금강산과 삼각산에도 머물렀으며, 양산 통도사에서 하안거를 결제하고 성덕산에서 동안거를 결제하였다. 백양사에 머물러 있다가 구곡으로 들어가 수행을 하기도 했다”라고 말하며, 글 말미에는 “갑오년(1894) 현재 세속 나이 33세로 강원도 간성 건봉사에 머물고 있다”며 이회광의 행각을 기록하고 있다.

이회광은 언제쯤 백양사에 머물렀을까? 선운사 비결 사건이 있던 1892년 전후는 아닐까? 부질없는 상상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일정한 지위에 있었고, 서울과 강원도 건봉사가 주 활동처였던 보운긍엽은 동학과 관련된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현재로서는 그 연결고리를 이회광을 제외하고는 찾을 수 없다.

이상으로 「동학도개국음모건」에 기록된 네 명의 승려 중 수연을 제외한 보운긍엽, 환송인원, 농은우엽의 대략적 흔적을 찾아보았다. 그 문서가 실제 상황을 첩보한 것인지, 아니면 내밀한 사정을 아는 어떤 사람이 이들을 앞에 내세운 것인지 확언할 수 없다. 「동학도개국음모건」 문서에는 승려들 외 여러 명이 거론되는데, 그중 일부는 실존 인물이고 비결 사건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 승려의 참여를 전적으로 부정하기도 힘들다.

흔적이 확인되는 승려들의 공통분모는 앞서 거론했듯이 백양사이다. 네 명의 흔적을 백양사에서 찾다 보면, 동학운동에 실제로 참여한 승려 한 명을 만날 수 있다. 백양사 출신이고, 농은우엽과 함께 설두유형의 『선원소류』 책 말미에 화주질에 등장하는 승려다.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승려를 다음에 만나 볼 예정이다.

 

<참고자료>

김재홍 지음, 김건우 역, 「영상일기」,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 5,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황현 지음, 김종익 역,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역사비평사, 2016.

범해각안 지음, 김두재 역, 『동사열전』, 동국대학교출판부, 2015.

이영호, 「선운사 석불비결사건과 정감록」, 『동학학보』 40, 동학학회, 2016.

한승훈, 「선운사 석불비결사건에 대한 종교사적 검토」, 『전북학연구』 3집, 전북연구원, 2021.

 

<동학농민혁명 사료아카이브> 사이트

오지영, 『동학사』 초고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이트

뮈텔문서, 「동학도개국음모건」.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사이트

「內藏寺故鶴鳴禪師靈骨及舍利通牒」, 『佛敎』 第六十二號, 1929.

『선원소류』 서지 및 이미지.

『선문염송집설화』 서지 및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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