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미소의 발견
“등잔 밑이 어둡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
전해 오는 속담이다. 그런데 그 말이 맞다. 자기 옆에 보물이 있어도 그것이 보물인지 모르고, 보석 같은 사람이 있어도 소중한 사람인지 모르고 지나치다가 나중에야 그 진가를 너무 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
2011년 봄, 부산에서 동해 바닷가 길을 따라 통일전망대까지 이르는 해파랑길을 걷고 있을 때 일이다. 경주시 양남면 읍천항을 지나가는데, 군부대의 철조망 때문에 바닷가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우뚝 서 있는 군부대의 초소에 마침 병사가 없어서 들어갔는데, 유레카!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읍천항과 하서항 사이의 해안을 따라 약 1.5km에 이르는 주상절리 중 바다 한가운데에 한 떨기 연꽃이나 부채처럼 누워 있는 비경 중의 비경 주상절리가 세상 처음 사람들에게 알려진 순간이었다. 군인들은 오랜 세월 그 주상절리를 보았지만, 바다에 떠 있는 기이한 것으로 보았을 뿐, 그것을 나라 안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라고 여기지 못한 것이다.
괴테가 『파우스트』에 적은 “온갖 것 보러 태어났건만, 온갖 것 보아서는 안 된다 하더라”라는 말을 어기고 금지된 곳에 들어가서 발견한 주상절리를 사진 찍어 내보내자 전국의 수많은 사진작가의 사진 속에 담겼고, 지금은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 곳이 되었다. 중국 귀주성의 만봉림이나 장가계가 뒤늦게야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과 같이, 해파랑길을 제안한 사단법인 ‘길 위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덕분에 알려진 명승이다.
그와 똑같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유레카’ 하면서 알려진 곳이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이다. 운산면 일대 사람들에겐 잘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이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59년이다. 당시 부여박물관의 홍사준 관장은 보원사지의 유물을 조사하러 이 마을에 와 있었다.
그때 인바위 아래에서 만난 나무꾼이 홍 관장에게 산 위에 있는 마애불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단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 인바위에 가면 환하게 웃고 있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고요. 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지요. 그런데 작은 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 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집어 던질 채비를 하고 있구먼유.”
고상하다는 것은 스스로 꾸미지 않는 것, 즉 자연스러운 것을 말한다. 그 지역에 대대로 살았던 사람이 보고 들은 것이기 때문에 마애삼존불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홍사준 관장은 곧바로 국보고적보존위원회의 김상기, 이홍직에게 보고했다.
그 후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박사와 황수영 교수가 현장 조사를 벌였다. 여러 차례 연구조사를 거쳐 1962년에 서산마애삼존불이 국보 제84호 불상으로 지정되었다.
세 부처 가운데에 있는 것이 본존인 석가여래입상이고, 그 왼쪽이 제화갈라보살, 오른쪽에 미륵보살이라고 본다. 그러나 당시에 성행했던 신앙에 따르면 석가세존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석가여래불의 옷맵시에서는 중국풍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크게 뜬 눈과 활짝 웃는 미소는 고전적인 양식이면서도 틀림없는 백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라 할 수 있다. 그 미소가 ‘신비한 미소’라고 불리는 것은 부처의 표정이 빛과 각도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양쪽의 협시 보살들도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여자의 모습이라서 ‘살짝 토라진 본부인에 의기양양해진 첩 부처’라는 장난스러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민족의 심성처럼 누구나 편안하게 만드는 너그러운 이런 웃음이 고구려의 미소를 백제화한 한국 불상의 독특한 형태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다.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이 발견된 다음 해인 1960년 5월, 「세대」지에 한국의 대표적인 고고학자 김원룡 선생이 ‘한국 고미술의 미학’을 기고했다.
“백제 불상의 얼굴은 현실적이며 실재하는 사람을 모델로 쓴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미소 또한 현세적이다. 군수리 출토 여래좌상은 인자한 아버지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라도 듣고 앉은 것 같은 인간미가 흐르는 얼굴과 자세를 하고 있어서 백제 불상의 안락하고 현세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 중 가장 백제 적인 얼굴을 가진 것은 작년(1959)에 발견된 서산 마애불이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김원룡 선생의 제안 이후 이 서산마애삼존불은 백제의 분위기를 가장 거리낌 없이 표현한 불상으로 알려져서 ‘백제의 미소’로 명명되었고, 이 삼존불을 답사한 황수영 박사는 1974년 8월에 나온 「박물관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애써 찾은 이 백제 삼존불 앞에 선 두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중략…) 어떻게 이 충격을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무언만이 이 같은 순간에 보낼 최고의 웅변이며, 감격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때 더는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삼존불을 보았던 그때, 그러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기백 교수 역시 1975년 5월의 「박물관 신문」에 ‘서산마애불의 여래상’이라는 글에서 삼존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예정보다 지연되기 했으나 열 시쯤에는 마애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맑은 날씨에 빛나는 햇살이 환히 비춰 불상들은 불그레 물들어 있었다. 만일 신비로운 경지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지 모르겠다.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마 영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토막으로 남을 것 같다.”
한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거의 비슷한 형태의 불교 작품들을 여러 점 남겼다. 그 작품들의 공통점은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신비한 미소이다. 절제된 표정의 은은하면서도 고뇌하는 미소, 모든 것을 넘어선 해탈의 경지에 이른 미소, 종교적인 사유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이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삼매경에 빠져드는 듯하다. 오묘하면서도 성스러워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마음을 다 열고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너무도 인간적이고 편안한 미륵반가사유상이 불교미술의 최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국보 78호인 미륵반가사유상이다. 그 불상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불상이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국적이 신라 혹은 백제 혹은 통일신라라는 말들이 있지만, 삼국통일 후 백제 장인들이 경주 조각계에 편입하면서 제작했다는 견해도 있다.
어찌됐건 ‘우리나라 국보 중의 국보’로 평가될 만큼 한국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걸작인 이 반가사유상은 조화로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신체와 선명한 이목구비와 함께 은은하게 퍼지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엄숙하면서도 자애로운 종교적 숭고미를 발산하고 있는 이 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두고 최순우 선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슬픈 얼굴인가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지 않고, 미소 짓고 있는가 하면 준엄한 기운이 누르는,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이 서려 있다. ” 그 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이 열렸었다. 그때 이 반가사유상은 다음과 같은 평을 받았다.
“세계적 수준의 세련미, 그 아름다움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처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 어떤 아름다운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은은한 미소 때문이었다.
이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너무나 닮은 반가사유상이 교토의 코류지(広隆寺)에 안치된 나무로 만든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옛날 백제 사람이 만들어 보낸 불상으로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본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남겼다.
“나는 오늘까지 몇십 년 동안의 철학자로서의 생애 중에서 이만큼 인간실존의 진정으로 평화스러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불상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의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진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스퍼스가 우리나라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나 서산마애삼존불을 보았다면 과연 어떻게 경탄하고 어떤 말을 남겼을까?
마애삼존불이 품은 도량들
“네가 세상을 보고 미소를 지으면 세상은 너를 보고 함박웃음을 짓고, 네가 세상을 보고 찡그리면 세상은 너에게 화를 낼 것이다.” 『정글북』의 작가 러디야드 키플링의 말을 떠올리면서 삼존불을 바라보는 그 건너편에 있는 바위가 인암(印巖)이다. 사면이 돌로 되어 있고 이끼가 끼어 있는 이 바위는 석가모니의 인장을 속에 숨겨놓았다고 한다. 예전에 해미고을 원님이 이 인장을 꺼내기 위하여 석공을 시켜 바위를 떨어내려고 했는데, 별안간 구름이 일며 천둥 번개가 내려치고 소나기가 퍼부으며 큰 산이 흔들리고 움직여서 가까운 거리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원님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이 바위는 귀신이 돌봐주는 것으로 생각해 할 수 없이 일을 중지했다고 한다. 근처에 있던 무릉대(武陵臺)는 민간에 전하기를, 석가모니를 장사 지낸 곳이라고 한다.
서산마애삼존불이나 태안마애삼존불 또는 보원사지 등의 불교 유적이 서산 일대에 산재한 이유는 6세기 말엽 백제의 정치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 무렵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는 육로로 중국과도 교역하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 정책을 펴고 신라에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에는 중국으로 가는 길을 바다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당진과 태안 지역이 중국의 산둥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서산 일대가 교역항이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로 가는 길이 태안에서 서산을 거쳐 예산의 가야산으로 이르는 길이어서 그들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큰 절, 즉 보원사나 개심사 같은 절과 서산마애삼존불, 태안의 마애삼존불 또는 화전리의 사면석불이 만들어졌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에서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보원사지에 이른다. 사적 제361호로 지정된 보원사지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절터다. 통일신라 때 만든 화엄 10찰 중의 한 곳인 보원사지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이 일대에 아흔아홉 개의 절이 있었는데,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자 모두 불이 나서 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올 뿐이다.
그곳에서 산길을 따라가다가 만나는 절이 마음을 열고 가는 절, 개심사다.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를 가슴에 품고, 서산 일대의 절을 답사하다가 보면 온몸과 정신이 미소 속에서 은은한 광채로 빛나지 않을까?
사진. 유동영
신정일
문화사학자 겸 작가이자 도보 여행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불러온 ‘도보 답사’의 선구자다. 한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를 기획해 금강에서 압록강까지 답사를 마쳤고, 한국의 산 500여 곳을 올랐다. 『신택리지』, 『한국의 사찰 답사기』, 『한국의 암자 답사기』, 『신정일의 동학답사기』, 『왕릉 가는 길』 등 70여 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