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 전에
2021년 7월 22일 오전 10시경 금산사의 대종이 긴 울음을 토해내며 구슬프게 울었다. 사시예불 시간인가? 그랬다. 그렇게 이승에서 월주 큰스님(이하 큰스님)과의 인연이 끝났다. 가슴 속 저 밑바닥이 짜릿하게 아려옴과 동시에 머릿속에는 무언가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러나 경황없이 속수무책으로, 그리고 존경하는 상좌스님들을 전적으로 믿으면서 그 아픔과 무게를 안은 채 금산사를 떠났다.
필자가 떠안게 된 것은 무엇일까?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큰스님 혹은 큰스님과의 인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재현할 것인가라는 큰 숙제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비록 추상적인 글의 형식으로나마 직접 결자해지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월간 「불광」에서 큰스님 관련 원고청탁을 받았다. 아직 49재도 지나지 않았고, 사적인 감정조차 정리되지 않은 마당에 뭔가를 쓰기에는 시간이 너무 이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자해지 의무감이 밀려왔다.
이 글은 ‘월주 스님의 발걸음을 함께 걷는다’라는 「불광」의 기획 의도를 그대로 반영해 ‘동행길’이란 주제로 한정한다. 다시 말하면 큰스님을 동행이란 차원에서 기억하고 동행이란 차원에서 재현해야 함을 당위적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당위란 이미 열반한 큰스님을 위한 당위가 아니라 큰스님이 남긴 자비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지구촌의 모든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한 당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마도 이것이 큰스님이 평생 온 삶으로 드러낸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행 길에 오르다
필자가 큰스님의 발걸음에 동행한 직접적인 계기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다. 기억을 소환해 보면 이렇다. 1990년대 초부터 중앙승가대의 불교사회학 강좌를 담당하기 시작해 박사논문 이후 새로운 연구 주제를 ‘불교사회학’으로 설정하고 닥치는 대로 경험적 연구를 시작했다. 때마침 1994년 종단개혁운동이 발발했고, 매우 다행스럽게도 그 운동이 성공해 이른바 개혁종단이 탄생했다. 이에 즉각 이 사건을 정치혁명이란 시각에서 분석해 학술지에 실었고, 작게나마 종단 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1995년 초 필자는 개혁종단 초대 기획실장 현응 스님에게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함께 할 것을 권유받았다. 선뜻 동참했다. 이른바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깨달음’은 ‘역사’와 만나야 한다는 현응 스님의 지론과 상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큰스님이 총무원장이었다.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최소한 ‘참여불교’의 관점에서는, 역대 총무원장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불교의 사회참여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스님임을 실감했다. 그 후 ‘이보현행오보리(以普賢行悟菩提)’의 깨달음 사상, ‘덕혜원만(德慧圓滿)의 실천 사상’ 그리고 그 종합으로서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이란 ‘수행·원력·보현행’ 사상 등을 담고 있는 큰스님의 말씀이나 법문은 불교사회학에 대한 필자의 인식, 관심과 열정을 뒷받침해주고 이끌어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큰스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귀일심원 요익중생’은 삼독과 같은 사사로운 마음을 여윈 일심, 즉 불성(혹은 법성 혹은 출가·승가 정신)을 깨닫는 것과 자비행이 상호의존성 및 상호침투성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컨대 큰스님은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에서, ‘세간을 떠나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육조단경』 구절을 즐겨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도 남겼다.
“나의 생애는 보살도와 보현행원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80여 년 인생과 60여 년 수행자의 길에서 느낀 것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략…) ‘진리는 세간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여전히 나의 화두이며 삶의 지침이다.”
아직 불교사회학자와 불교사회학적 성과를 가볍게 여기는 불교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1990년대 초 ‘참여불교’를 향한 큰스님의 관심이야말로 선구자의 카리스마 자체였다. 필자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에 진심과 환희심으로 동행한 이유이기도 했다.
큰스님을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참여불교인으로 기억한다. 사부대중이 꼭 기억하길 바라는 것 역시 불교 사회참여 혹은 참여불교 차원에서 큰스님 자취가 갖는 의미, 즉 ‘귀일심원 요익중생’이다.
동행의 현주소를 찾아서
매우 애석하게도 이제 이승에서의 물리적 동행은 끝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큰스님을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또 다른 동행의 과제, 즉 미래의 동행 문제가 남았다. 미래의 동행은 우리가 큰스님의 실천을 이어갈 때 차곡차곡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요익중생’을 위해서는, 큰스님의 실천을 우리가 반드시 재현해야 한다.
어쩌면 큰스님의 한평생 실천이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미래의 동행을 부촉(咐囑, 부탁해 맡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큰스님이 평생토록 실천한 보현행은 그 자체로 후세들이 본받아야 할 생생한 교훈이다. 지면 제약으로 큰스님이 실천으로 보여준 가르침을 실감적으로 전할 수 없어 매우 안타깝다. 그래도 한국불교의 참여불교 현주소를 고려할 때, 큰스님의 몇몇 대표적인 실천만으로도 우리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큰스님은 불교정화운동 참여, 총무원장 중심제 전환, 종단개혁 추진, 종헌종법 개정을 통한 사회적 실천의 법제화, 정치 권력으로부터 자유와 자율 획득 등 조계종 내적 과제를 실천했음은 물론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이나 불교계 내부의 각종 시민사회운동 등도 활발히 추진했다. 나아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활동, 종교 간 대화 모임,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 지구촌공생회 활동, 실업 극복 운동, ‘나눔의 집’ 등 대사회적 실천 활동에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참여해 그 책임을 다했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결단력은 놀라웠다. 1980년 6월 3일, 광주민주화운동이 무력으로 진압된 직후 정부 통제에도 총무원장 신분으로 광주를 직접 방문해 부상자와 유가족을 위로했다. 한발 더 나아가 조계종 총무원 차원에서 ‘광주시민돕기대책본부’를 구성해 “전 불자가 동체대비 사상으로 한마음이 되어 광주시민을 돕자”는 호소문을 내고 모금 활동도 전개했다.
총칼로 집권한 신군부의 엄혹한 체재 아래 내린 결단이었고, 고통받는 광주시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깨달음의 사회화’의 한 장면이다. 동시에 법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전국 사찰이 군홧발에 짓밟힌 ‘10·27 법난’이 발생했고, 큰스님은 강제 연행돼 보안사 서빙고 고문실에서 20여 일간 고초를 겪고 총무원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아픔도 겪었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일환으로 큰스님과 북유럽 4개국을 탐방했을 때의 가장 중요한 대화를 기억한다. 종단 정치에 철저히 손을 떼고 지구촌 차원의 참여불교운동을 전개하자는 대화는 지금도 가슴을 뛰게 한다. 그 후 큰스님은 지구촌공생회 활동을 시작했고, 지구촌의 소외된 이들 곁에 늘 계셨다.
필자는 최근 ‘나눔의 집’ 사건도 이 연장 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 최소한 큰스님과 관련해서 그렇다. 주지하듯이 ‘나눔의 집’ 활동은 혜진 스님의 주도로 불교계가 처음으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시작했고, 그것이 큰스님의 원력으로 이어져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갖추게 된 활동이다. 그런데도 ‘나눔의 집’ 사건으로 인해 이러한 독자성과 역사성이 훼손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촌 공생’이란 큰스님의 뜻이 폄하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동행의 미래를 향하여
큰스님의 ‘지구촌 공생’을 위한 실천 하나하나가 보통사람으로서는 한 가지도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어렵고 힘겹다. 이 활동을 평생 지속했다는 사실은 큰스님의 삶 모든 순간이 ‘귀일심원 요익중생’이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추측건대 큰스님에겐 별도의 임종게가 필요하지 않았던 까닭이리라.
“하늘과 땅이 본래 크게 비었으니, 일체가 또한 부처이구나. 오직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가 임종게가 아닌가.”(월주 스님 임종게)
큰스님 열반과 더불어 이른바 한국종교 및 사회 전체의 큰 어른이던 삼두마차(불교 송월주, 가톨릭 김수환, 개신교 강원룡)가 모두 이승에서의 동행을 마쳤다. 그러나 고 김수환 추기경과 고 강원룡 목사는 한국천주교와 한국개신교는 물론 사회 전체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은 성자의 반열로 치켜세워지고 있다.
다비장에서 총무원장 원행 스님도 큰스님의 속환사바(速還娑婆)를 발원했다. 아마도 그 발원 속에는 큰 스님의 ‘귀일심원 요익중생’ 활동이 미래로 뻗어 나가야 한다는 당위와 바람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지구촌의 모든 고통 받는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큰스님의 원력 이기도 하다. 이제 동행의 미래는 이 땅에 살아남은 자들이 얼마나 큰스님의 ‘귀일심원 요익중생’에 동행하느냐에 온전히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