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이관묵 ‘저녁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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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이관묵 ‘저녁 강’
  • 동명 스님
  • 승인 2022.06.07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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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수종사에서 내려다 본,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수종사에서 내려다 본,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저녁 강
_이관묵

강가에 무릎 세우고 앉아
흘러가는 강물 무연히 바라본다
사는 일이 모두
흐름에 물들다 가는 일이라고
한 여울이 다른 여울을 세차게 껴안는다
흐름의 수심 깊이 가라앉은 무겁고 느린 生이 있지
다 왔다, 다 왔다 할머니 목소리를 내는
그리움으로 읽히기도 하고
쓸쓸함으로도 읽히는 세상을 빌려
띄엄띄엄 달맞이꽃이 피었다 지는구나
내가 끌고 다닌 길이여
어느 깊은 그늘에 이르러 미치게 뒤척이며
내 傷한 노래와
노래 곁에서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는
우울한 저녁 하늘을
너는 또 어느 기억 속으로 이끄는 것이냐

(이관묵 시집 ‘가랑잎 경(經)’, 시선사 2007)

[감상]
가끔은 강가에 무릎 세우고 앉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시를 쓰든 쓰지 않든 시인이 됩니다. 오현 스님이 시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대한 특별한 감각이 있는 이, 특별한 훈련을 거친 이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시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시를 쓰는 것은 글을 아는 이는 누구나 가능합니다. 더욱이 시를 느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아니 가지게 되는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듯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시를 느끼고 쓰는 순간만큼은 남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미 시인입니다.

그렇게 강가에 앉아 강물 무연히 바라보면, 이관묵 시인처럼 “사는 일이/ 모두 흐름에 물들다 가는 일이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 여울이 다른 여울을 껴안으며 흘러가는 것이 곧 세상의 흐름, 삶의 흐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흐름의 수심 깊이 무겁고 느린 우리의 生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울은 할머니의 목소리를 냅니다. “다 왔다, 다 왔다”라는 여울 물소리가 그리움으로 읽히기도 하고 쓸쓸함으로도 읽히듯이, 달맞이꽃이 띄엄띄엄 피었다 집니다.

시인은 “내가 끌고 다닌 길이여!”라며, 길에게 말을 겁니다.

“내 상傷한 노래와/ 노래 곁에서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는/ 우울한 저녁 하늘을/ 너는 또 어느 기억 속으로 이끄는 것이냐”?

무릎 세우고 앉은 시인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기억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걸 일일이 받아적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것도 받아적지 않는 기억의 수첩 속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쓰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시인처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내가 끌고 다닌 길’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볼까요? 과연 우리 기억의 수첩 속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요?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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