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진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태바
[시가 말을 걸다] 진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 동명 스님
  • 승인 2022.08.09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해남 대흥사 연리근(連理根), 천불전에서 대웅보전으로 가늘 길목에 있다. 가지가 붙은 연리지, 나무가 붙은 연리목은 많지만, 뿌리가 붙은 연리근은 매우 드물다.
해남 대흥사 연리근(連理根), 천불전에서 대웅보전으로 가늘 길목에 있다. 가지가 붙은 연리지, 나무가 붙은 연리목은 많지만, 뿌리가 붙은 연리근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_진란

꽃들의 구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너와 내 뿌리가 맞닿은 것을 볼 수 없다는 것
서로 얽히고설켜도
둘의 뿌리를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와 내가 꽃으로 피어 마주 보는 시선이
뜻하지 않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다
너의 향기도 너의 속삭임도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 많이 쳐다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침묵하고
더 많이 주고 싶어지는 마음
세상에 함께하는 시간에 우리는 살고
살아 있고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뿌리와 뿌리를 맞대고 연리지가 되기까지
자유를 향하여 달려가는 네 도주의 흔적을 따라
나는 또 피어나고 피어나고
피어나고

톡 톡 톡 떨어지는 낙화는
문득 네 꿈속에서 또 다른 뿌리를 내리고

(진란 시집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 시인동네 2022)

[감상]
자연의 이치는 대체로 남녀(암수)가 서로 만나 동족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단순한 생명체일수록 암수의 만남도 단순하지만,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은 남녀 간의 만남이 매우 복합적인 문제를 만듭니다.

인간의 남녀관계는 단지 후손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권력과 관련된 복잡다단한 문제와 연결됩니다. 단순한 동물의 남녀(암수)관계는 짝짓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인간의 남녀관계는 자식을 낳기 전에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고 자식을 낳은 후에는 더욱 복잡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부부가 한집에서 산다 해도 그 뿌리가 같아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부부가 되어도 둘 중 더 사랑하는 쪽에서는 늘 아쉽기 마련입니다. 꽃으로 피어 마주 보고 있지만, 뜻하지 않은 바람에 흔들리고, 어떤 경우에는 둘 중 하나가 먼저 바람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은 “더 많이 쳐다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침묵하고/ 더 많이 주고 싶어지는 마음”이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톡 톡 톡 떨어지는 낙화는/ 문득 네 꿈속에서 또 다른 뿌리를” 내린답니다.

남녀 간의 사랑 속에는 자유를 향하여 도주하는 마음과 소유를 위하여 꼭 움켜쥐려는 마음이 공존합니다. 두 마음이 지나치게 되면, 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음 속에서도 ‘중도’를 찾는다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