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한거] 우중상념雨中想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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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한거] 우중상념雨中想念
  • 석두 스님
  • 승인 2022.10.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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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여름비가 매섭게 내리더니 빈도(貧道)가 머무는 서울 강남 봉은사 일대에 물난리가 났다. 여름 가뭄을 원망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 이제 물난리가 났다고 야단이다. 부족하면 애달파하고, 넘치면 걱정하는 것이 어리석은 중생들의 마음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군자여하장자족(君子如何長自足) 
소인여하장부족(小人如何長不足) 
부족지족매유여(不足知足每有餘)  
족이불족상부족(足而不足常不足) 
낙재유여무부족(樂在有餘無不足)   
우재불족하시족(憂在不足何時足)          
구재외자하능족(求在外者何能足) 
고금지악지부족(古今地絡在知足)
천하대환재부족(天下大患在不足)        
부족여족개재기(不足與足皆在己)    
외물언위족부족(外物焉爲足不足)            
일상경서도미심(一床經書道味深)
상우천고사우족(尙友千古師友足)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만족하며,   
소인은 어찌하여 늘 족하지 아니한가.  
부족해도 만족할 줄 알면 늘 여유로움이 있고,  
족함에도 부족하게 생각하면 
항상 부족하기만 하네.   
즐거움이 넉넉함에 있으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 
근심이 부족함에 있으면 언제나 만족할까?   
밖에 있는 것을 구하면 어찌 능히 만족하리오.        
고금의 지극한 즐거움도 족함을 앎에 있고,        
천하의 큰 근심도 족함을 알지 못함에 있도다.  
부족함과 족함은 모두 내게 달렸으니,              
외물이 어찌하여 족함과 부족함이 되리오. 
책상 가득 쌓인 경서엔 도의 맛 깊고 깊어           
천고의 사람을 소중한 벗으로 함이니, 
스승으로 심을 만한 벗이 족하구나.”      

위의 한시는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1534~1599)의 ‘족부족(足不足)’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도(道)가 어찌 산에만 있겠는가?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巨頭)인 김장생의 스승인 구봉은 서얼 신분으로 출세의 길을 접고 학문에 몰두, 수많은 제자를 양성해 서인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수많은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의 소용돌이에 얽혀 노비로 환속되고, 도망자 신분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유배형에 처해 모진 고난의 역사를 온몸으로 산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쓴 ‘지족(知足)’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법문이다. 스승이신 세존께서도 만족(滿足)은 늘 지족에 있음을 설하지 않으셨는가!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 함께 조선 중기의 성리학의 대가이자 도학자인 구봉 송익필은 생전에 서로가 우정과 학문을 나누며 절차탁마(切磋琢磨)했고, 예(禮)와 정(情)을 나누며, 평생 변치 않는 벗으로 지냈다. 

간밤에 내린 비의 양이 약 422mm라고 한다. 체감하는 비의 양과 수량화된 비의 양이 잘 와닿지는 않는다. 겨우 몇 mm 비의 양으로 이렇게나 큰 피해를 주다니! 물은 때때로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고 빼앗아 가기도 한다. 인류는 물에서 태동했고, 물을 잘 다스리는 왕권은 그 지속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태동기의 인류 신화는 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 홍수 신화의 주인공 복희는 그리스의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들에게 불과 기술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악신(惡神)이 인간을 홍수로 멸망시키려 했을 때, 복희가 이를 막았고, 복희와 그의 파트너 여와(여와는 그의 친여동생)만 홍수에서 살아남아, 둘이 결혼해 다시 인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치수(治水) 작업을 하던 우(禹, 중국 최초의 왕국)임금이 어느 동굴에서 ‘뱀과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는 신’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복희씨였다고 한다. 우임금의 치수 사업과 복희씨의 홍수를 막은 이야기는 일종의 콜라보라고 할까?

이번 비는 80년 만에 온 큰비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보다 먼저 발생했던 일제강점기인 1925년 7월의 ‘을축년 대홍수’를 당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뚝섬 상부에 있는 신천리(新川里), 잠실리(蠶室里) 두 동리는 약 1,000호에 약 4,000명이 전부 물속에 들어서 모두 절명 상태에 있다는데, 그곳은 무인고도(無人孤島)와 같이 되어, 배도 들어갈 수 없으므로 구조할 도리가 전연 없으며, 17일 밤 10시경부터 살려 달라는 애호성(哀呼聲)이 차마 들을 수 없이 울려왔는바, 그동안 모두 사망하였는지도 알 수 없더라.”

‘을축년 대홍수’로 기억되고 있는 1925년 대홍수는 7월 초순부터 9월 초순까지 4차례에 걸쳐 홍수가 발생해 전국의 하천이 범람했다고 한다. 1차 홍수는 400mm 호우로 한강 이남의 낙동강, 금강, 만경강 유역에 큰 피해가 있었고, 2차 홍수는 약 650mm에 달하는 집중호우로 한강 수위가 12.74m에 달하는 사상 최고의 기록을 남겼다. 이때 한강 유역의 영등포, 용산, 뚝섬, 마포, 신설동 등지가 침수됐다고 한다. 지금보다 강 수변 정리가 되어 있지 않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비가 왔음을 알 수 있다. 대홍수로 잠실 주변은 크나큰 지형 변화를 겪었고,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

‘을축년 대홍수’의 결과로, 지금과 같이 육지가 아닌 섬으로 존재했던 잠실섬 주변의 한강 지류가 바뀌게 된다. 그 당시 한강 본류가 석촌호수가 있었던 송파강에서, 지금의 한강 지류인 신천강으로 흐름이 바뀌게 된다.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강북지역과 가까웠던 잠실이 강남지역이 됐고,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성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뱃길이었던 송파나루가 급격히 쇠퇴했다. 섬이었던 잠실이 육지가 된 것은 1971년 북쪽 물길을 넓히고, 남쪽 물길을 폐쇄하는 한강 공유수면매립 때부터이다. 이 매립으로 현재의 잠실동과 신천동이 생겨났다.

또한 새로운 유적지가 대홍수로 드러났다. ‘을축년 대홍수’가 지나간 1925년 풍납동 일대에서 홍수로 서쪽에 있던 벽이 허물어지면서 많은 유물이 세상에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일제는 1936년 추가 조사를 벌여 이것을 조선 고적 27호로 지정했고, 풍납동 일대가 500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던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이리하여 1,400년간 잠들어 있던 한성백제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 총독부는 남아 있던 토성만 고적으로 지정하고 내부엔 도시를 건설해 현재는 완벽한 한성백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잊혔던 한성백제의 역사가 ‘을축년 대홍수’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을축년 대홍수’ 당시 ‘조선일보’는 한강 홍수로 647명 사망, 가옥유실 2만 3,400호로 ‘단군 이래 이런 비극은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봉은사 주지였던 학밀 청호(學密 晴湖) 스님은 대홍수 때, 사중의 재산을 털어 목선 5척을 사들여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 708명의 목숨을 구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어 구제했다. 

이때 목숨을 건진 이재민 대표들은 ‘대본산 봉은사 주지 라청호 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를 세웠고, 이 공덕비는 아직도 봉은사 경내에 들어서면 사천왕상을 지나자마자 우측 비석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명인사들이 시와 그림으로 청호 스님의 고귀한 뜻을 기린 「불괴비첩」에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은 ‘받들어 감사드리며’라는 시로 청호 스님의 선행을 이렇게 노래했다.

“홍류변벽해(洪流飜碧海)
잠실실상전(蠶室失桑田) 
반야선행처(般若船行處)
중생성명전(衆生性命全) 
대홍수가 푸른 바다 뒤집으니  
잠실마저 뽕밭을 잃어버렸네.
반야의 저 배가 운행된 곳마다   
중생들의 생명이 온전해졌다네.”

청호 스님은 한 생명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구한 것이다. 이제는 법비(法雨)로 내려서, 중생을 살리는 비가 되었으면 좋겠다. 

 

석두 스님
1998년 법주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봉암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불광사, 조계종 포교원 소임을 역임했으며, 현재 봉은사 포교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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