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스님] ‘가지산 호랑이’ 인홍仁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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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스님] ‘가지산 호랑이’ 인홍仁弘
  • 효신 스님
  • 승인 2022.11.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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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복 위에서 죽기를 꿈꾼 수행자, ‘가지산 호랑이’ 인홍仁弘
‘가지산의 호랑이’ 원허당 인홍 스님. 현공 스님 제공

중노릇 제대로 하는 비구니가 되려면 가지산 석남사로 가라는 말이 있었다. 석남사는 인홍 스님과 동격처럼 여겨진다. 제대로 중노릇 하기 위해서는 인홍(1908~1997) 스님 밑에서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한 중생제도를 위해 백천 생을 따라다니는 불보살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생에서 출가자답게 살라고 호통치는, 엄하기로 유명한 스님이었다. ‘수행자는 신심이 있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인내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일체중생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며 1초라도 헛된 시간을 보내지 못하게 제자들을 채찍질한 스님이다. 대장로니(大長老尼) 원허당(園虛堂) 인홍 선사라는 호칭보다 ‘가지산의 호랑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대장부 같은 마음 씀씀이

인홍 스님이 대중을 이끌고 태백산에서 석남사로 내려온 것은 1957년,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5월이었다. 여기에는 범어사에서 강사를 지낸 비구 스님이 머물고 있었는데, 절 살림이 너무 어려워 이 절을 맡을 만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짐을 풀고 보니, 대웅전의 지붕 기와는 듬성듬성해서 법당엔 비가 새고, 산바람과 골바람이 강해 한 번 바람이 불면 도량에는 솥뚜껑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인홍 스님은 오는 날부터 허리에 밧줄을 메고, 대웅전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이었다. 도량에는 우물도 없었다. 처음엔 대웅전 앞에 놓여 있던 말구유에 물을 퍼 놓고 밥을 지었다. 그렇게 지붕 기와 하나하나, 우물 등 모든 것을 상좌들과 함께 정비하며 도량불사를 마쳤다. 상좌 중 특히 묘경·법희·법용 스님 등은 정말 일을 많이 했다. 눈 뜨면 지붕에 올라가는 게 일상이었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대중들이 직접 도량을 일구었으니, 그 애정이야 표현할 길이 있겠는가. 그러니 생전 마지막 당부를 청하는 상좌들에게 “대중이 화합해서 석남사를 잘 지켜라”라는 말을 남겼다. 상좌 법희·법용·도문 스님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평생 석남사를 지켰고, 진관 스님은 서울 진관사에서, 불필 스님은 해인사 금강굴에서, 백졸 스님은 부산 옥천사에서 스승의 가풍을 계승했다. 

당대 스님들은 인홍 스님을 장부요, 마음 씀은 더 대장부라 칭했다. 석남사 법문을 거의 도맡아온 통도사 지안 스님의 회고는 인홍 스님의 성품을 총체적으로 설명해준다.

“인자하고 자비상이 넘치는 모습과 함께 아주 장부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스님으로 각인되어 있는 분이다. 정진력이 뛰어났고 소박하고 예를 잘 알아 사람대접을 여법하게 하셨다. 또 스님만큼 사심이 없고 삼보정재를 아꼈던 분도 드물 것이다. 살아 있는 정신으로 불법을 외호했던 수행자다.” 
(『길 찾아 길 떠나다』, p.248) 

인홍 스님의 인자하고 자비상이 넘치는 모습과 동시에 장부 기질을 보여주는 단편의 사건이 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초여름, 태백산 백련암에서 정진할 때였다. 한밤중에 젊은 인민군이 군홧발로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 좌선 중인 스님에게 총부리를 겨누고는 소리쳤다. “밥 내놓우라.” 어이없던 스님은 “야, 이놈아! 밥 달라는 놈이 어~디 총을 들고 밥 내놓으라 하냐, 이런 나쁜 놈 같으니!”라며 더 호통을 쳤다. 이 말에 마음이 동한 인민군이 무릎을 꿇으며, 눈물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잘못했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요. 스님, 밥 좀 주이소.”

이뿐일까. 일화는 또 있다. 스님이 석남사로 올 당시 절 초입에는 뱀탕 가게가 쭉 늘어서 있었다. 유리병에 든 뱀도 흉측했지만, 뱀 달이는 그 냄새도 너무나 고약했다. 도량 정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스님은 매일같이 상인들과 싸워야 했다. 녹록지 않았다. 처음에 이들은 생존권을 박탈하려는 스님을 향해 소리를 치며 강하게 항의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매일 찾아와 호통치는 스님의 기상과 끈질긴 설득에 눌려 결국 자진 철거를 했다. 

직접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잇는 
석남사 스님들. 현공 스님 제공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과 인연

인홍 스님의 뛰어난 정진력은 많은 일화가 있지만, 그중 성철 스님과 만남에서 이루어진 정진은 대표적이다. 1949년 겨울, 부산 월내 묘관음사에서 향곡 스님과 성철 스님을 만났는데, 장좌불와를 하던 성철 스님을 본받아 본인도 동안거 기간에 장좌불와를 했다. 잠을 자지 않고 졸음이 오면 행선으로 정진에 집중했다. “하루에 적어도 20시간 이상 화두가 한결같게 들려야만 비로소 화두 공부를 하는 것이고, 하루 중 아무리 바쁘고 바쁠 때라도 화두가 끊어짐 없이 꿈속에서 항시 한결같아야 한다”는 성철 스님의 법문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아침 정진 후 포행 중이던 스님을 본 성철 스님은 살얼음이 언 못에 그대로 밀어 넣었고, 옆에 있던 향곡 스님이 손을 내밀어 건져 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작은 깨달음이 있어 흠뻑 젖은 누비 두루마기를 벗지 않고 그대로 행선하며 정진했다. 이때 “이분을 의지해 성불하리라” 마음먹었다. 법의 스승, 성철 스님을 출가 8년 만에 만난 셈이다. 

인홍 스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의지하며 살았다. 석남사는 부처님 정법대로, 성철 스님 법대로 사는 회상을 만들기 위해 수호한 도량이었다. 석남사의 가풍은 성철 스님의 이상이 실현된 곳이라 해도 가히 틀린 말이 아니다. 성철 스님이 해인사에서 그토록 확립시키고 싶었던 능엄주와 108대참회의 일과가 석남사에서 실현되었다. 아울러 매년 정초에 능엄주와 대참회 기도가 24시간 내내 7일 동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곳은 석남사뿐이다. 

1994년 석남사에서 84세를 기념해 상좌들과 함께 찍은 사진. 현공 스님 제공

인홍 스님은 쉰이 되기 전에 공부의 결실을 보고자 했다. 도솔암에서 정진하던 시기에는 호랑이의 보호도 받았다. 한밤중이면 호랑이 한 마리가 스님의 방문 앞에 앉아 불침번을 서 주곤 했는데 그리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앞서 덫으로 짐승을 잡으려는 포수들을 본 스님이 “부처님이 계신데 어디 살생하러 오는가”라며 불호령을 내리자, 포수들이 산에 놓았던 덫을 모두 거둬 간 일이 있었다. 어쩌면 호랑이의 불침번은 여기에 대한 보답이었을 수도 있지만, 스님의 정진력이 온 생명을 감동하게 했으리라. 스님은 이 시절에 공부를 마치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하며, “그때 거기서 내가 공부를 마쳤어야 했어…”라는 혼잣말을 자주 했다.

일흔둘에 지리산 상무주암의 동안거, 일흔넷에도 지리산 대원사 선방에서 안거를 지내고, 여든셋에 석남사 3년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의 그 정진력을 감히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죽는 날까지 정진하고 싶다”는 스님의 정진력에 “건강은 어떠십니까?”가 아닌 “스님, 화두는 성성하십니까?”라는 말로 제자들은 아침 문안을 드렸다. 

인홍 스님 좌우로 상좌 법용, 불필 스님. 현공 스님 제공
불필, 도문, 인홍, 법용, 법희 스님. 현공 스님 제공

 

“삼세 불조 가신 길 나도 가야지”

스님은 상(相)을 내세우지 않고 소박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예를 표하는 사람이었다. 석남사에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온 부목(負木, 절에서 땔감을 마련하는 소임) 거사가 있었다. 1년을 지켜본 스님은 그에게 자운 스님이 주지로 있는 표충사로 출가하기를 권했다. 몇 해가 지나 그 부목이 비구가 되어 인사하러 왔는데, 스님은 가사장삼을 수하고 삼배의 예를 올리며 성대하게 대접한 뒤 보냈다. 이런 스승의 마음 크기에 혀를 내둘렀다는 상좌 법용 스님의 생전 회고다. 본인으로서 도저히 하기 힘든 행동을 스승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큰스님께 예를 올리듯 똑같이 하시던 모습이 두고두고 남아 있다 했다. 스님은 세속의 잣대가 아닌 법의 입장에서 사람을 대하셨던 것이다.

옛 어른들이 다 그러하셨지만, 스님은 일체의 사심 없이 삼보정재를 아꼈던 분이다. 아끼고 아껴서 복을 지어 그 복도 아끼라고 당부하던 스님이었다. “복을 아껴라, 흐르는 물도 아껴 쓰라”고 늘 경책했는데, 법사스님에게도 아껴 복 짓는 내용의 법문을 많이 해달라고 따로 청할 정도였다.

인홍 스님의 이런 절약 정신은 입산해 첫 연을 맺은 한암 스님에게서 시작됐다. 스님은 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리 출신으로, 모친이 큰 말을 탄 갑옷 입은 장군이 집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그래서 속명이 이귀동(李貴童)이다. 1941년 9월 34세에 출가하러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강릉 길에서 만난 노파의 소개로 한암 스님이 있는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님은 한암 스님에게 소개받은 월정사 산내 암자 지장암의 정자(淨慈)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전쟁의 여파로 부산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한암 스님 밑에서 출가자로서 기틀을 잡았다. 특히 물자를 아끼는 것으로 복을 쌓는 한암 스님의 행동이 인홍 스님의 평생 기반이 된 것이다.

삼보정재에 관한 스님의 가치관은 이후락(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씨를 만나 『한글대장경』 발간 사업에 대한 도움을 청한 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불사가 한창인 석남사가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1960년대, 울산 신도가 이후락 씨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사전정보로 부탁의 내용을 알고 있던 이후락 씨는 스님께 편하게 말씀하시라 했는데, 스님은 당신 절의 불사가 아닌 운허 스님이 주관하는 『한글대장경』 발간 사업에 도움을 청했다. 절 불사에 관한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나랏일 하는 사람에게는 불교를 위해 도움을 청하는 것이 도리에 맞아 그리했다고 한다.  

한국 비구니교단을 정비한 스님의 업적만큼 법명 앞뒤로 수많은 명호가 있으나 닭벼슬보다 못한 것으로 당신의 칭호를 밝히려 하면, 큰 몽둥이로 사정없이 내리칠 것이다. 그러니 스님의 열반송으로 그리움을 대신한다.

“삼세 불조 가신 길을 나도 가야지 / 
구순 생애 사바의 길 몽환 아님 없도다 / 
일엽편주 두둥실 떠나는 곳 / 
공중에 둥근 달 밝을 뿐이네.” 

제사 후 인홍 스님 부도를 참배하는 대중. 법희 스님 제공

 

효신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철학과 국어학,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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