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필연인 듯, 우연인 듯 밝아옵니다. 어제도 새벽이 열렸으니 오늘 또 열린다고 하는 것은 필연입니다. 새벽이 또 올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가 맞는 새벽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새벽은 어제의 새벽과 같지 않습니다. 어쩌면 필연인 새벽보다 가끔 우연인 새벽이 더욱 신비롭습니다.
자연히 돌아가는 것과 어긋남
새벽에 동이 트기 시작하면 온갖 풀벌레와 짐승들이 깨어납니다. 정말로 정확합니다. 자연 그대로입니다. 자연히 되어가는 것과 한 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랑비만 내려도 작은 것들은 소리 없이 고요합니다. 모두 어딘가 숨어서 조용히 내리는 비를 피하며 견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 비가 잠깐이라도 그칠라치면 언제 그랬냐는 양 너도나도 세차게 울어댑니다.
산지와 가까이 있는 농토에 고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모두 겪는 일이 있습니다. 고라니가 내려와 연한 고추 순을 싹싹 따먹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추는 밑에서부터 새로 순을 내야 하고 결국 제대로 고추가 달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밭을 이른바 ‘노루망’으로 38선처럼 둘러칩니다. 어느 날 밭을 출입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쪽문을 깜박하고 닫지 않고 내려왔습니다. 다음 날 가보니 쪽문이 열려 있었는데도 고추밭은 안전했습니다. 고라니가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고라니는 그 쪽문으로 들어가면 큰 그물망에 갇히는 신세가 될 것으로 염려하여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고라니의 동물적인 육감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런 생물들과 좀, 한편으로는 매우 다릅니다.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기도를 하며 새벽을 깨웁니다. 잠자던 온갖 생물들에겐 산사에서 울리는 사물소리와 낭랑한 예불소리가 기분 좋은 새벽 음악소리였을까요, 아니면 엄청나게 스트레스받는 군대 기상나팔 소리 같은 것이었을까요?
아무튼, 사람은 자연히 돌아가는 것과는 어긋나게 행동하는데 1등 혹은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새벽보다 일찍 일어나기도 하고, 비를 맞으며 일을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온갖 생물들이 한껏 울어대며 일을 할 때 푸지게 먹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풀벌레 소리도 숨죽인 고요하고 이슥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하거나 낮에 하지 못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육체에 매이거나, 육체를 버리거나
인류 역사에서 모든 생명체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은 아마도 보편적이었을 것입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풀과 같은 식물들, 더 나아가 돌과 같은 무정물들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영혼은 자연히 되어가는 것과 함께 따라서 생동하고 사라집니다. 마치 풀벌레들이 새벽 동트는 것과 함께 울어대고 가랑비만 내려도 숨을 죽이듯이 영혼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움직입니다. 아니, 영혼이 자연에 그대로 맞추어 가는 것 같습니다. 자연의 숨결과 함께 숨 쉬고 함께 숨을 거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요? 다음은 생전에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제창하셨던 법정 스님의 법문 중 한 구절입니다.
“육체 속에 영혼이 깃든 게 아닙니다. 이 몸 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육체를 거느리고 있는 거예요. 영혼은 육체가 제 할 일을 다 하면 낡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한쪽에 벗어놓습니다.”
그렇게 벗어놓고 난 다음에 새로운 움이 트고 새로움이 돋아난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움’은 어쩌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일지 모릅니다. 사람 이외에 모든 생명체는 해마다 보면 그 이전 해의 반복일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해살이 하는 것들을 보면 그 육체에 묶여 해마다 똑같이 반복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벗어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나이가 들어 육체의 수명이 다하여 부득이 내려놓을 때가 된 까닭에 그럴 수도 있지만, 어떤 특별한 인연에 닥쳐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육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육체를 버린 듯이 행동하는 게 그런 경우입니다.
열혈 지사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을에 한동댁이란 노인네가 계셨습니다. 생전에 오뉴월 뙤약볕에도 밭일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큰아들이 “엄니 뙤약볕에 일하시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고 밭을 팔아버린다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돌연 홀로 지내던 집에서 세상을 뜨셨습니다만, 하여튼 육체를 버린 듯이 일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대단한 분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살아가는 과정에 어느 시점마다 헌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움이 트는 새로움의 육체로 갈아탑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말이죠. 나이 40을 인생 전환주기라고 합니다. 사람의 육체가 이 시점을 계기로 크게 변화합니다. 성장에서 쇠퇴로 가는 기점이다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때 암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소생을 위한 길에서 새로 움터야 할 육체를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의지를 가진 영혼의 몫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여든다섯 잡수신 장모님에게 넌지시 여쭈어보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몸에서 떠난다는데 어떨까요?”
“사람들이 그렇다고들 하는데 난 안 닥쳐봐서 모르것네.”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이 많았습니다.
윤남진
동국대를 나와 1994년 종단개혁 바로 전 불교사회단체로 사회 첫발을 디뎠다. 개혁종단 순항 시기 조계종 종무원으로 일했고, 불교시민사회단체 창립 멤버로 10년간 몸담았다. 이후 산골로 내려와 조용히 소요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