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에서는 수행의 차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선불교 수행을 어렵게 여긴다. 선불교는 수이불수(修而不修)라는 수행법을 내세우기에 더욱 애매하게 생각된다. 이는 선불교가 전제하고 있는 원리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에 이를 포기할 수도 없다.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기에 수행을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가 애매하다. 만약 닦는다면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단계도 설명하지 않는다. 오로지 ‘본래 마음’을 지켜라, 드러내라고만 한다.
이러한 가운데 선불교의 계보를 이으면서 선불교의 수행 차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십우도(十牛圖, Ten Ox Diagram)이다. 십우도는 소를 대상으로 열 가지 그림으로 수행단계를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보명의 목우도는 곽암의 심우도와 함께 대표적인 선불교의 수행도(修行圖)로 꼽힌다. 두 수행도 모두 열 개의 그림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둘 다 십우도라고 부를 수 있다. 둘 다 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하나는 심우도(尋牛圖, Finding Ox Diagram)이고, 하나는 목우도(牧牛圖, Taming Ox Diagram)이다. ‘심(尋)’과 ‘목(牧)’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소를 찾는 것이고, 하나는 소를 기르는 것, 길들이는 것이다. 기르는 것은 길들이는 것과 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우도에서 찾는 소는 ‘본래 마음’이라고 한다면, 목우도에서 길들이는 소는 ‘번뇌’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소를 공통적인 대상으로 하지만, 심우인지, 목우인지에 따라서 소의 상징이 달라지게 된다.
목우도에는 2종류가 있다. 청거 호승(淸居皓昇)선사의 목우도송 12장과 보명선사의 목우도송 10장이 있다. 청거의 목우도송은 일부만 현존하고 전체는 전해지지 않는다. 목우도의 지은이인 보명(普明)은 송나라 때 섬서성 보계 태백현 태백산에 상주했다고 하나, 생몰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시대순으로 보면 청거–보명–곽암의 순이라고 한다(장순용, 『선이란 무엇인가』(세계사, 1991), p.114). 이글에서 사용하고 있는 보명의 목우도 원문은 『만속장경』의 「신각선종십우도(新刻禪宗十牛圖)」를 따른다.
① 미목(未牧)
첫 번째 목우도는 미목이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상태의 소를 보여주고 있다.
生獰頭角恣咆哮(생영두각자포효)
犇走溪山路轉遥(분주계산로전요)
一片黑雲横谷口(일편흑운횡곡구)
誰知步步犯佳苗(수지보보범가묘)
흉악하게 생긴 머리뿔 가지고 멋대로 울부짖으며
산과 계곡을 분주하게 쏘다니니 길은 점점 멀어지네.
한 조각 검은 구름 계곡 입구에 걸리니
걸음걸음이 좋은 싹을 밟는 줄 누가 알리요.
소는 흉악하게 생긴 뿔을 가지고 마음대로 울부짖으며 산과 계곡을 분주하게 길 아닌 곳을 멋대로 쏘다니고 있다. 소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헐떡이며 울부짖는다. 게다가 소가 있는 산과 계곡에 검은 구름까지 끼어서 앞을 분간하지 못하기에, 소가 내딛는 걸음걸음에 싹들은 밟혀 죽어 나간다.
소 자신도 사납고 분주하지만 주변의 좋은 싹 역시 짓밟고 있는 것이다.
미목의 야생 상태 소는 번뇌로 가득한 범부의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번뇌로 가득한 마음은 사납고 흉악하고 분주하게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다. 번뇌로 인한 괴로움으로 울부짖는다. 그리고 이러한 번뇌의 구름으로 가려져 있기에 그 걸음걸음은 선근(善根)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조그마한 선근도 자라지 못하게 밟아버린다.
첫 번째 목우도를 보면 소는 번뇌와 함께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번뇌라면 마지막 목우도에서 소는 죽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소를 본래 마음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본래 마음은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사라진 가운데 드러나는 마음일 진데, 아직 번뇌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그러기에 소는 번뇌와 함께하는 마음, 즉 객진번뇌를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은 범부의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다.
② 초조(初調)
두 번째 목우도에서 목동은 소의 코에 코뚜레를 꿰려고 하고 있다.
我有芒繩驀鼻穿(아유망승맥비천)
一廻奔競痛加鞭(일회분경통가편)
從來劣性難調制(종래열성난조제)
猶得山童盡力牽(유득산동진력견)
내가 가지고 있는 코뚜레로 쏜살같이 코를 뚫고 끈으로
한 번 돌리자 날뛰고 다투면서 아파하지만 채찍질 가하네.
이전의 나쁜 성질 제어하기 어려우니
오히려 목동은 힘을 다해 잡아당기네.
목동이 코뚜레를 하는 모습이 생생히 기술돼 있다. 꼬챙이로 코를 뚫고, 뚫린 코 사이를 노끈으로 걸어서 한 바퀴를 돌린다. 반항하는 소와 급하게 다투면서 아프게 채찍질을 가한다. 소의 야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라, 목동은 온 힘을 다해 코뚜레를 잡아당긴다. 소는 이제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
필자의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송아지가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할아버지께서 코뚜레를 하셨다. 코뚜레용 나무를 불로 둥글게 휘게 만들고, 끝을 뾰족하게 깎으셨다. 뾰족한 코뚜레 나무로 코 사이를 뚫고 끼우셨다. 처음 코뚜레가 살을 뚫고 들어갈 때 소의 공포스러운 눈망울이 아직도 생각난다. 소의 입장에서는 죽을 때까지 코뚜레를 풀지 못하고 이를 쥔 목동에게 좌지우지되는 출발점이 된다.
번뇌의 입장에서 보면 열성(劣性)으로 표현되는 번뇌를 처음 다룰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급하게 시간을 다투면서 또한 아프게 채찍질해 가면서 준비한 꼬챙이와 노끈으로 코를 뚫어야 한다. 여전히 사납고 흉포한 성질을 부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쓰면서 반항할 것이다. 모든 힘은 목동만이 쓰는 것이 아니라, 소도 마찬가지다. 이제까지 한 번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처음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③ 수제(受制)
이제 코뚜레는 꿰어졌고 소는 목동을 따른다.
漸調漸伏息奔馳(점조점복식분치)
渡水穿雲步步隨(도수천운보보수)
手把芒繩無少緩(수파망승무소완)
牧童終日自忘疲(목동종일자망피)
점점 조복하면서 날뛰고 치달리던 것 그치고
물 건너 구름 뚫고 걸음걸음 따르네.
손으로 고삐를 잡고 조금도 늦추지 않고
목동은 종일토록 저절로 피곤함으로 잊네.
소는 조복하기 시작하고 더 이상 날뛰지 않게 된다. 코뚜레가 꿰어진 이상 소는 반항하는 것이 고통만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목동은 코뚜레를 꿸 때처럼 온 힘을 다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목동이 고삐를 늦추지는 않는다. 겉으로는 날뛰지 않지만 언제든 열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번뇌를 조복받기 시작했고 날뛰던 것은 그쳤고, 목동을 따라서 걸음걸음을 따라가고는 있다. 하지만 여전히 번뇌는 언제든지 올라올 수 있다. 그러기에 번뇌를 조복하려는 노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더 이상 처음 번뇌를 조복할 때처럼 힘들지는 않지만 여전히 방심할 수 없는 상태다. 목동에 의해서 번뇌가 다스려지고 있는 상태지 아직 자발적으로 번뇌를 다스리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자발성이 드러나게 되는 계기를 네 번째 목우도에서 볼 수 있다.
④ 회수(廻首)
목동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아직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목동은 여전히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네 번째 목우도에서 자발적으로 따르는 계기가 등장하게 된다.
日久功深始轉頭(일구공심시전두)
顚狂心力漸調柔(전광심력점조유)
山童未肯全相許(산동미긍전상허)
猶把芒繩且繫留(유파망승차계유)
날이 지나면서 공들이는 것이 깊어지니 처음으로 머리를 돌리고
미쳐 날뛰는 마음의 힘이 점차 조절되고 부드러워지네.
목동은 아직 전적으로 허락하지 못하니
오히려 고삐를 잡아 여전히 매어두는구나.
고삐를 잡고 조금도 늦추지 않기를 날마다 지속해서 한다. 이러한 가운데 소는 처음으로 머리를 돌린다. 이때 머리를 돌린다는 것은 처음으로 자발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는 점차 조절되고 부드러워지게 된다. 아직 유연해지는 단계지, 전적으로 목동의 말을 듣는 단계는 아니기 때문에 목동은 고삐를 여전히 잡아매 두고 있다.
낚시꾼들이 고기를 잡을 때 고기가 처음 미끼를 물 때부터 둘의 힘겨루기는 시작된다. 물고기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하고 모든 힘을 다해서 낚싯바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낚싯줄에서 느껴지는 힘과 반대 방향으로 도망간다. 낚시꾼은 릴을 풀기도 하고 감기도 하면서 고기의 힘을 뺀다. 어느 한순간 물고기는 자신이 끌려가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때가 회수다. 머리를 돌린다, 아니 머리가 돌려진다. 회수 이후에도 지속해서 반항하지만, 이제 대세는 낚시꾼에게로 기울게 된다.
이제 번뇌의 마음, 즉 미쳐 날뛰는 마음은 점점 조절되고 부드러워진다. 이제 소는 처음으로 코뚜레를 당기는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목동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미덥지 않다. 계속해서 공력을 들였지만 아직 번뇌가 전적으로 조복된 것은 아니다. 완전한 조복이라고 할 수 있는 순복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있는 것이다.
⑤ 순복(馴伏)
이제는 조복을 넘어서 순복으로 나아간다. 조복이 여전히 비자발적이라면 순복에서는 자발적으로 따르게 된다.
綠楊陰下古溪邊(녹양음하고계변)
放去收來得自然(방거수래득자연)
日暮碧雲芳草地(일모벽운방초지)
牧童歸去不須牽(목동귀거불수견)
푸른 버들 그늘 밑 옛 시냇가에
풀어주고 거두어들임이 저절로 되네.
해 질 녘 구름 푸른 방초의 땅
목동은 돌아가나 오히려 끌지 않네.
순복에서 목동은 코뚜레를 푼다. 목동은 집으로 돌아가는데 더는 소를 끌고 가지 않는다. 소를 풀어주고 돌아오는 것이 저절로 된다. 이제 풍경은 검은 구름 대신 푸른 버들 그늘 밑 시냇가가 되고, 해 질 녘의 구름과 푸른 방초가 있는 땅이 된다. 소가 밟는 걸음걸음이 더 이상은 싹을 헤치지 않는다.
다섯 번째 목우도에서 목동은 코뚜레를 풀고 있다. 이는 목우의 과정에서 도약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복을 넘어서 순복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 목우도에서 그렇게 소가 아파하고 공포에 질려 있는데, 채찍질을 가하면서 뚫은 코뚜레를 이제는 풀고 있다. 코뚜레 역시 방편이었다.
일상에서 소의 코뚜레는 평생을 두고 따라다닌다. 죽을 때만이 코뚜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코뚜레가 풀린다는 것은 범부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목우도의 반을 넘으면서 소는 번뇌가 중심이 되는 범부의 삶에서 성인의 삶으로
나아가는 상징이 된다.
⑥ 무애(無碍)
이제는 이러한 엎어짐이 편안해진다. 불편하지가 않다. 그림에서도 소는 엎어져 있다.
露地安眠意自如(노지안면의자여)
不勞鞭策永無拘(불로편책영무구)
山童穩坐靑松下(산동온좌청송하)
一曲昇平樂有餘(일곡승평낙유여)
맨땅에서 편안히 자니 뜻하는 바대로 되고
힘들여 채찍질하지 않아도 영원히 걸림이 없네.
목동은 푸른 소나무 아래 편안히 앉아
노래를 부르니 평안하고 즐거움이 넘치네.
이제는 어느 곳에 있더라도 편안하고, 뭘 하든지 뜻대로 된다. 힘들여 소에게 채찍질할 필요도 없다. 평안하고 즐거움의 남음이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영원히 구속되는 바가 없다.
첫 번째 목우도에서는 소가 전부였는데, 여섯 번째 목우도에서는 소보다는 목동이 주인공이 된다. 소로 상징되던 번뇌가 순치되자, 목동의 즐거움이 드러난다. 목동의 즐거움은 목우, 즉 소를 길들인 결과이기도 하다. 어디에 거하든 편안하고, 뭘 해도 뜻에서 벗어나지 않고, 즐거움이 넘치고, 무엇보다 걸림이 없다. 이는 번뇌를 순치한 이후의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무애(無碍)라고 할 때, 애(碍)가 번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다. 이제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⑦ 임운(任運)
이제 소가 뭘 해도 목동의 입장에서는 괜찮다. 반대로 목동이 뭘 해도 소의 입장에서도 괜찮다. 어떻게 움직여도 이치에 맞게 된다.
柳岸春波夕照中(유안춘파석조중)
淡烟芳草綠茸茸(담연방초녹용용)
饑食渴飲隨時過(기식갈음수시과)
石上山童睡正濃(석상산동수정농)
버드나무 언덕가 봄 물결을 석양이 비출 때
아지랑이 피고 방초는 푸르고 푸르구나.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때에 따라서 지나가니
바위 위의 목동은 졸음이 깊어지네.
목동은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졸리면 존다. 뭘 해도 때에 맞춰진다. 버드나무 물가에 저녁 햇살이 비추니 아지랑이 피어나고 풀은
더욱 푸르다. 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무엇을 하더라도 때에 맞게 된다.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모든 행동이 때에 맞게 된다. 반대로 때를 맞춰 모든 행동을 하게 된다. 배고파 밥 먹는 것은 밥을 먹는 행동이 배고픈 때에 맞는 것이고, 밥 먹을 때는 배고픈 것이다. 이처럼 모든 행동에 걸림이 없다. 이는 아지랑이 피고, 방초가 푸른 것과 같은 것이다.
⑧ 상망(相忘)
임운이 행동에 걸림이 없다면, 행동이 없을 때 상망이 된다. 행동을 할 때는 임운하고, 행동이 없을 때는 상망한다.
白牛常在白雲中(백우상재백운중)
人自無心牛亦同(인자무심우역동)
月透白雲雲影白(월투백운운영백)
白雲明月任西東(백운명월임서동)
흰 소는 늘 흰 구름 속에 있고
사람은 절로 무심하고 소도 또한 그러하네.
달이 흰 구름 뚫으니 구름 그림자 희고
흰 구름 밝은 달은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네.
이제 소는 구름 속에 있고, 사람도 무심 속에 있다. 이때의 무심도 저절로 된 무심이다. 달만이 구름 그림자 만들고 동서로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소도, 목동도 없다. 장애가 없는 상태에서는 걸림이 없고, 모든 행동이 때에 맞고, 행동이 없을 때는 무심이게 된다. 순서대로 번뇌가 사라지고, 번뇌 아닌 행동이 일어나고, 이제는 번뇌 아닌 행동마저도 일어나지 않는다.
⑨ 독조(獨照)
서로를 잊은 상태에서 혼자 남게 된다. 굳이 대상이 필요 없게 된다.
牛兒無處牧童閑(우아무처목동한)
一片孤雲碧嶂間(일편고운벽장간)
拍手高歌明月下(박수고가명월하)
歸來猶有一重關(귀래유유일중관)
소 없는 곳에서 목동은 한가롭고
높고 푸른 봉우리 사이 한 조각 외로운 구름
밝은 달 아래서 손뼉 치며 소리높여 노래하니
돌아와도 한 겹 문이 남아 있네.
무심에서 한가로움으로 나아간다. 무심하니 한가로운 것이다. 이제 소를 잊어버리고 목동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는 길들여야 할 것이 없게 된다. 길들인다는 것은 상대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아홉 번째 목우도에서는 더 이상 목우가 아니게 된다. 더 이상 번뇌를 대상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홀로 비추는 공부가 된다. 이제는 비추는 공부만 남는다. 더 이상 길들일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길들일 것이 없다는 것을 비추는 것뿐이다. 아는 것도 아니다. 알면 또 무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비추는 것이다. 이러한 비춤의 궁극에서 비춤 자체도 사라지게 된다. 그 하나의 마지막 관문만이 남게 된다.
⑩ 쌍민(雙泯)
마지막 하나의 관문이다. 비추는 것마저도 사라진다.
人牛不見杳無蹤(인우불견묘무종)
明月光寒萬象空(명월광한만상공)
若問其中端的意(약문기중단적의)
野花芳草自叢叢(야화방초자총총)
사람도 소도 보이지 않고 자취마저 아득하게 없으니
밝은 달빛 차갑고 만상은 공하네.
그 가운데 그 뜻 묻는다면
야화방초가 저절로 무성하네.
소도 없어지고 사람도 없어진다. 소의 흔적도, 사람의 흔적도 사라진다. 아홉 번째 목우도에서는 손뼉 치며 노래 부르는 목동이라도 있었지만, 마지막 목우도에서는 그마저도 자취를 감춘다. 만상이 공하다는 말도 단지 말일뿐이지만 그러한 것이고, 단지 밝은 달빛, 무성한 방초만이다. 이를 굳이 표현하자니 원상만 남는다. 이 원상은 공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공과 함께 무성한 야화방초가 있다. 공의 세계와 현실이 세계가 함께 놓여 있다. 진제와 속제가 함께 놓여있다. 진제만 있는 것도 아니고, 속제만 있는 것도 아니다. 둘이 함께 있는 것, 속제 속에 진제가 있는 것, 진제 속에 속제가 있는 것이 선의 이상이다. 그러한 선의 이상을 원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목우도, 어떻게 볼 것인가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번뇌를 제거하거나, 제어하는 단계를 거친다. 보명은 이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를 길들이는 과정을 제시한다.
미목에서 완전히 검은 소는 초조에서는 주둥이 부분만 희게 되고, 수제에서는 머리 부분이 희게 되고, 회수에서는 앞발까지 희게 된다. 순복에서는 몸통 앞부분이 희게 되고, 무애에서는 꼬리와 엉덩이 부분만 빼고 모두 희게 된다. 임운에서는 꼬리만 검은 소가 풀을 뜯고, 상망에서는 꼬리마저도 희게 된다. 색깔이 흰색으로 바뀌는 것은 번뇌가 제거되는 정도를 보여준다.
우리의 번뇌가 번뇌가 될 수 있는 까닭은 무의식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인을 알 수 없기[무명無明] 때문에 더욱 괴로운 것이다. 이유라도 알 수 있으면 수긍이 되거나, 수긍이 되지 않으면 다른 방편을 강구해 볼 수 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괴로움 때문에 더욱 괴로운 것이다. 미목(未牧) 상태의 소는 우리에게 의식화되지 않은 번뇌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걸음걸음마다 좋은 싹을 해치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성이 처음으로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 두 번째 초조(初調)다. 자기 괴로움의 원인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괴로움의 원인으로서 번뇌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궁리하게 된다. 달래보기도 하고, 윽박질러 보기도 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지속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이 번뇌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조복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구름 위에 태양이 있듯이, 번뇌는 객진(客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이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안다. 즉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것이다. 비록 개별적인 전투에서 질지라도, 큰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이다.
이러한 전쟁에서 결정적인 지점이 회수(廻首)다.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이는 무의식적인 번뇌를 어느 정도 의식하는가에 달려 있다. 의식화의 정도가 쌓이면 쌓일수록 어느 한순간 무게추가 기울어지게 된다. 그 지점이 회수다.
무의식의 의식화는 융(Carl. G. Jung)이 자기 심리치료의 목표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보명의 목우도에서도 결정적인 지점이 회수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 지점에서 소가 머리를 돌리듯이, 번뇌에 대한 의식화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만큼 의식화되어 버린다. 그러기에 목우에 있어서 회수지점까지 번뇌를 의식화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이 지점을 넘어가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이 지점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지점에서 구름 위에 태양이 보이기 시작하고, 객진인 번뇌는 주인에게 자리를 내놓기 시작한다. 회수의 순간 대세는 기울어지게 되고, 번뇌는 꺾이기 시작한다.
이 회수를 지나게 되면 순복(馴伏)의 단계는 오위(五位)의 수행 계위 가운데 견도위(見道位)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순복과 마찬가지로 견도위는 세 번째로, 다섯 가지 계위 중 한가운데 있다. 견도위를 기준으로 범부와 성인의 기준이 나뉘어진다. 범부에서 성인으로 머리를 돌리게 된다.
이렇게 꺾이게 된 번뇌의 기세는 점점 부드러워지고 순화되고 무애(無碍)로 나아간다. 무애에서는 더 이상 번뇌가 문제 되지 않는다. 번뇌가 남아 있을지라도 더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이제 번뇌라는 에너지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힘이 된다. 임운(任運)이 그러한 단계다. 번뇌 자체는 에너지다. 그러기에 그 에너지는 궁극의 목표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번뇌즉열반’이라는 말은 이러한 임운의 단계에서 성립하는 말이다.
이제 번뇌는 에너지로, 힘으로만 남게 된다. 이때의 소는 『법화경』 「비유품」의 소를 생각나게 한다. 『법화경』 「비유품」에서 장자는 화택(火宅)을 벗어난 아들들에게 우거(牛車)를 선물로 준다. 이때의 흰 소는 멍에를 메웠으니, 그 피부 빛깔이 매우 깨끗하고 몸매가 아리따우며 또 끄는 힘이 매우 세고 걸음걸이가 평정하고 빠르기가 바람 같다고 한다. 멍에가 씌워지기 이전의 소를 미목의 번뇌라고 한다면, 멍에가 씌워진 소는 삼계를 벗어난, 번뇌가 제어된 모습이다. 나아가서는 흰 소는 삼계라는 화택을 벗어난 것에 대한 선물이면서도 화택을 벗어난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무의식은 더 이상 무의식이 아니게 된다. 사납고 흉포한 원시성 그대로의 무의식이 아닌, 의식화된 무의식이 된다. 의식화된 무의식은 궁극적 목표로 나아가는 강력한 도구이면서 유일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를 잡는 것이 아니고, 고기를 낚아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소를 의식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화의 모습이 소의 흰 색깔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목우라고 할 때, 목(牧)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이제 의식화가 완전하게 이뤄지는 단계에 이른다. 소는 전체가 흰색이 된다. 소에게서 다른 색은 없다. 다른 색이 없는 완전한 의식화는 어떤 단계일까? 소가 완전히 대낮처럼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소를 잊어버리는 단계를 생각할 수 없었다면 무의식의 완전한 의식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를 잊어버리기에 꼬리마저 흰색이 되는 것이다. 오히려 의식화의 궁극에는 이러한 잊어버림이 존재한다. 궁극에는 둘 다 소멸하게 된다. 소멸이 되지 않는 한에서는 완전한 의식화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정도의 의식화까지로 나아갈 때, 완전한 의식화, 완전한 깨달음이 가능해진다.
‘깨달음을 깨달음이라고 할 때는 더 이상 깨달음이 아니다’는 『금강경』의 수많은 구절이 이러한 단계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로지 남는 것은 비추는 것밖에 없다. 굳이 『반야심경』을 들지 않더라도 이 방법론은 궁극의 깨달음으로, 완전한 의식화로 나아가는 방법론의 점정(點睛)이 된다.
● 참고문헌
「신각선종십우도(新刻禪宗十牛圖)」,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장순용, 『선이란 무엇인가』(세계사, 1991)
윤희조
서울대 철학과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불교상담학 전공지도교수로 재직 중이며, 불교와심리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