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mm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로 2020년 8월 8일 아침에 섬진강 둑이 무너져 구례읍과 강 마을들이 물에 잠겼다. 사나운 물살이 마을과 비닐하우스들을 할퀴었고 축사에 갇혔던 700여 마리의 소들도 참변을 피하지 못했다.
이날 오후 섬진강에 접해 있는 구례군 문척면 오산의 사성암에 10여 마리의 소 떼가 나타났다. 천행으로 축사를 탈출한 소 떼가 3km가 넘는 구불구불 산길을 힘겹게 올라와 마애약사여래입상 앞마당으로 피신했다. 마치 참변을 피하지 못한 소들의 왕생극락을 바라며 기도를 드리는 모습 같았다.
이 광경은 뉴스로 보도됐고, 사성암에 오른 소 떼 사진은 폭우의 피해를 전국적으로 알렸다. 소들의 기도에 답해 사성암에서는 수해에 생명을 잃은 동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49일째 되는 날 위령제를 봉행했다.
뜻밖의 선물, 사성암
섬진강이 좋아 귀거래사를 부르며 구례 마산면 사도리 마을로 귀촌한 필자에게 뜻밖의 선물이 왔다. 필부로서는 미처 헤아릴 수 없던 귀한 선물이었다. 아침에 깨어 창문을 열면 첫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오산과 사성암이다. 마을 앞뜰 섬진강 건너 우뚝 솟은 오산 사성암 아래로 운해가 펼쳐진 풍경은 카메라를 챙겨 그곳으로 내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필자가 사는 ‘사도리’마을 또한 사성암과 인연이 깊은 것을 알았다. 사성암의 성인 네 분 중 한 분인 도선국사가 섬진강 모래밭에서 그림을 그려가며 풍수의 원리를 깨달았다는 바로 그 마을이다. 실제로 사성암 도선굴에서 바라보면 사도리마을이 곧바로 내다보이니 그 맥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저물녘이면 섬진강을 붉게 물들이며 저무는 노을의 풍경은 얼마나 황홀하던지! 그 풍경들을 쫓아 봄 여름 가을 겨울 밤낮없이 사성암으로 내달리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헤아릴 수도 없다.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 사성암
2020년 미국의 유명한 방송국인 CNN이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 33곳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구례군에서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사성암 4곳이나 선정됐다. 구례가 아름다운 풍광의 고장임이 널리 알려졌다.
CNN은 사성암을 한국의 아름다운 사찰 중 하나로 꼽은 이유로 드라마 <추노>를 언급했다. 여배우 이다해가 <추노>의 유명한 장면을 찍은 곳이며, 사성암에서 보는 지리산과 섬진강의 경관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며 극찬했다.
사성암은 <추노> 외에도 <토지>, <군도> 등의 영화 촬영지며 뮤직비디오 촬영지 명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사성암 운해 -무궁무진, 구례 안개
지리산과 백운산 자락을 이으며 섬진강이 휘돌아 가는 구례는
산수유 열매 붉어지는 가을이면 무궁무진 안개 마을이 된다.
이 아침도 안개는 높낮은 사람의 길을 지우고
평등한 새 길을 만들어 놓았다.
저마다 맘껏 꿈을 꾸게 하는 무궁무진 안개의 길.
안개의 길을 따라 오산 사성암 전망대에 서면,
평등한 구름 위로 번지는 보드라운 아침 빛이
다시 한번 꿈을 꾸게 한다.
무궁하고 무진한 안개의 구례 아침이 이리 따스하고 눈부시다.
봄가을 펼쳐지는 사성암의 운해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몇 해 전 섬진강 발원지인 전북 무주 데미샘에서부터 남해에 이르는 광양 망덕포구까지 열흘간 오백 리 물길을 따라 걸으며 섬진강 구석구석 풍경을 살펴봤다. 그중 단연 으뜸 풍경은 사성암에서 한눈에 바라보는 지리산과 섬진강이었다. 여느 산처럼 오르기 힘든 곳도 아니어서 일반인들이 섬진강을 조망하기에는 최고의 명당이다.
삼대삼미(三大三美) 구례의 진산, 오산
‘원수에게도 예를 베푼다’는 깊은 뜻을 품은 구례(求禮)는 예부터 ‘세 가지가 크고, 세 가지가 아름다운 땅’이라 일컬어왔다. 아흔아홉골의 품 너른 지리산과 오백 리 맑은 물길 섬진강, 그리고 구만리 넓은 들판이 세 가지의 큰 것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이 어우러져 빚어낸 빼어난 아름다운 풍경과 기름진 들판에서 넘치는 풍요로움, 순박한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을 세 가지의 아름다움으로 꼽았다.
이 아름다운 고장인 구례의 진수를 맛보려면 사성암에 올라야 한다. 사성암에 올라 마주 보이는 지리산 능선들, 오산을 휘돌아 흐르는 섬진강, 구례의 마을 마을들의 진경산수화가 눈앞에 펼쳐진다.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사성암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위치한 오산(鰲山)은 해발 530m의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지리산과 섬진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산세가 자라 모양과 비슷하여 큰 자라 ‘오(鰲)’ 자를 써서 오산이라고 부른다.
오산 꼭대기에 자리한 사성암은 544년 백제 성왕 때 백제의 고승이자 화엄종의 시조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당시에는 오산암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참선하는 바위가 있어 선석암(禪石庵)이라고도 했다.
사성암 사적(史蹟)에는 오산암에서 원효대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등 4명의 고승이 수도해 사성암(四聖庵)으로 고쳐 불렀다고 기록됐다. 500년 세월 동안 4명의 고승이 한 장소에서 수행한 영험한 장소가 바로 사성암이다. 또한 네 명의 선인들이라 일컫는 사선(四仙)이 수도하여 ‘사선암(四仙岩)’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사성암 약사전(藥師殿)에는 깎아지른 절벽에 마애여래입상이 기둥을 받치고 있으며 ‘유리광전(琉璃光殿)’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약사전 뒤쪽 바위벽에는 원효대사가 손톱으로 그렸다고 전해지는 마애여래입상(약사여래부처님)이 음각돼 있다.
보는 순간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기암절벽 위에 절묘하게 어울려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사성암은 경관이 뛰어나 명승 제111호로 지정된 곳이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이기도 하다. 낙조대 신선대 등의 바위와 절집이 절묘하게 서로 조화를 이뤘으며, 섬진강이 구례읍과 지리산 연봉들을 굽어 흐르는 모습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우수한 경관 조망대로 이 풍광을 보기 위해 매년 2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사성암 소원바위
이달 들어서만 세 번이나 새벽 사성암에 올랐다.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사성암 소원바위에
기대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다.
소원바위라 새겨진 동판 표시석을 가만 쓸어본다.
손끝에 전해지는 반질반질한 감촉에서 많은 이들의 소원한 마음이 느껴진다.
비는 오지 않지만 흐릿한 운무의 날들.
잠시 열린 운무 사이로 지리산과 섬진강이 다가온다.
사성암에 와서 이런 풍경들을 담아 간다면,
한 가지 소원이 꼭 이뤄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에 손(損)이 되겠는가!
유리광전의 약사여래불을 참배하고 돌계단을 오르면 나타나는 소원바위.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꼭 이뤄준다는 소원바위에는 부처님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조각돼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자리 잡은 산왕전 주위의 깎아지른 바위에도 여기저기 부처님의 얼굴 모습이 보인다.
사성암에서 600m만 오르면 섬진강 일출을 볼 수 있는 오산 전망대에 다다른다. 전망대에서 운해 위로 떠오르는 섬진강의 일출을 보고 사성암 활공장으로 내려와 운해가 걷히기를 기다린다(활공장은 패러글라이딩의 출발점이다).
서서히 운해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구례읍과 섬진강을 내려다보면 선인이 되어 속세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든다. 운 좋은 날이면 낙조대에서 만날 수 있는, 섬진강을 물들이고 지리산 자락까지 번지는 그 노을빛을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구례에 오면,
아니 생에 한 번쯤은 사성암에 일부러 와보시라.
지리산 노고단 반야봉 왕시루봉 능선 우러르는 배례석,
사람의 마을 구비구비 적시는 섬진강을 굽어보는 낙조대.
바위 절벽에 매달아 세운 유리광전 마애여래입상, 도선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소원바위.
아침놀 붉을 때도, 파란 하늘 구름 예쁠 때도,
저녁노을 붉을 때도
달려가면 진경산수화 풍경을 펼쳐 보여주는 곳.
고향 친구들, 강원도 처가 식구들, 충청도 제주도의 시인들
데리고 가면 다들 입을 못 다무는 곳.
힘든 일이 있을 때, 기쁜 일이 있을 때, 소원하는 일이 있을 때
언제라도 달려가면 마음 환해지는 곳.
구례에 오면, 아니 생에 한 번쯤은 일부러 와보시라.
와서 그 누구도 그려낼 수 없는 진수산경 화첩을 받아가시라.
사진. 유동영
김인호
광주에서 태어나 현재 구례에서 살고 있다. 시를 짓고 있으며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시집 『섬진강 편지』, 『꽃앞에 무릎을 꿇다』,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보다』 등을 펴냈다. 인터넷 신문 <지리산-인> 편집장으로 일하며, <구례들꽃 사진반>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