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은사는 본디부터 지리산의 관문이었다. 또한 화엄사만큼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일주문과 극락보전을 포함해 극락보전 안의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 후불탱화인 삼장보살도가 각각 보물로 지정됐다. 금동불감(金銅佛龕)과 괘불탱화 역시 보물이다.
예부터 ‘화엄사의 교(敎), 천은사의 선(禪)’이라 불릴 만큼 천은사와 암자들은 지리산의 수행처요, 선승들이 찾던 곳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화재관람료’ 문제의 대표 사찰로 부각했고, 천은사의 가치는 훼손됐다. 보물과 수행처가 아닌 ‘관람료’를 통해 천은사는 세상에 더 알려졌다.
2019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 성삼재로 오르는 사람들은 관람료를 내지 않아도 됐다. 화엄사와 천은사, 그리고 정부 여러 기관이 협의해 내린 결단이었다. 그 이후 다른 사찰을 방문할 때도 관람료를 내지 않게 됐다. ‘문제아’에서 ‘해결사’가 된 것이다.
지리산 산신기도
관람료 문제가 해결되고 천은사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됐다. 바로 앞 저수지를 따라 ‘상생의 길’이라는 둘레길이 조성됐고, 숲과 물을 찾아 많은 사람이 찾는다. 주말이면 꽤 넓은 주차장이 꽉 채워질 만큼 찾는다.
“얼마 전까지 천은사는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머무는 공간이 됐어요. 구례 사람들이 많이 찾아요. 화엄사부터 연기암을 올라가는 길이 산책로였는데, 지금은 천은사 앞 저수지를 에워싼 둘레길도 많이 찾습니다.”
대진 스님(천은사 주지)은 남원은 물론 순천에서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스님은 관람료 문제가 해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21년 주지로 부임했다. 부임 후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창문살의 문풍지’를 바꾸고 경내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다.
밖에서야 관람료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천은사에 있는 사람들 역시 나름대로 아픔이 있었다. 자극적인 시선은 물론이거니와 시끄러움과 번잡함으로 수행자들이 있을 공간이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오래 머물지 못했고, 절이 쇠락한 기운을 보일 때도 있었다.
또 하나 시작한 것이 ‘지리산 산신기도’다. 매월 음력 초사흘에 산신기도를 시작했고, 시작부터 끝까지 스님이 목탁을 잡고 기도와 축원을 드린다.
“산신기도는 사는 공간에 대해 존경을 표현하는 겁니다. 우리는 지리산 언저리에 얹혀살고 있잖아요? 방장선원 뒤편 바위에 ‘산왕지위(山王之位)’라 쓰인 위패가 있어요. 돌로 새긴 석패입니다. 제가 천은사로 출가할 때만 해도 팽나무 두 그루가 함께 있었죠. 와보니 한 그루는 말라 있더라고요. 나무를 구해 심고,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그러면서 산신재(山神齋)도 시작했습니다.”
매월 음력 초사흘에 산신기도를 올리고, 봄(음력 3월 3일)과 가을(음력 9월 9일) 1년에 두 차례 산신재를 올린다. 스님은 “절이 많이 안정된 듯하고, 신도들도 좋아하고 많이 찾는다” 말한다.
지리산 재즈 페스티벌
천은사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지리산 재즈 페스티벌(JIRISAN JAZZ FESTIVAL)이다. 그전에도 음악회를 진행했지만, 2023년부터 재즈로 변화시켰다.
“재즈는 여러 가지 장르를 포괄하는 다양성이 있는 음악입니다. 듣다 보면 손이 저절로 음을 타고, 어떤 곡은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하죠. 지리산은 어머니처럼 품어주는 산이며 편안한 산이기도 하지만 아픔의 산, 그리움의 산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죽어간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 곳이 지리산입니다. 재즈가 갖는 한의 정서가 지리산과 맞아요.”
평소에도 음악을 좋아했고, 천은사에 와서 무언가 차별화된 요소를 찾고 싶었다. 올해 페스티벌의 주제는 ‘고독(solitude)’. 8월 30일부터 31일까지 이틀에 걸쳐 진행됐다.
“재즈 페스티벌은 구례군민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구례군민들이 이런 문화를 즐길 기회가 많지 않아요. 또 동원이 아닌 자발적으로 오는 외지 사람들이 하룻밤을 보내면서 지리산과 구례에 머뭅니다. 숙박하면서 구례 경제에 작은 도움이 되죠.”
대진 스님은 여기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지리산 재즈 페스티벌’은 어느 순간 특색있고 제대로 된 페스티벌로 마니아들에게 소문나기 시작했다. 스님은 “이제 시작입니다”라고 힘줘 말한다.
은둔자의 길
천은사에 머무는 대중이 꽤 많다. 12명이 넘는 스님과 13명에 이르는 직원들, 단위 사찰치고는 많은 편이다. 화엄사는 승려복지를 교구본사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갖췄다. 천은사에도 어른 스님들이 머물고 있다. 직원 역시 근래에 많이 늘어났다.
천은사는 고려시대 충렬왕 때부터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불렸고, 지리산의 수많은 수행처를 품어주던 사찰이었다. 방장선원(方丈禪院)은 이름만큼이나 수행자들이 찾던 곳이었고 삼일암, 도계암, 수도암, 상선암 같은 암자 역시 수행자들의 거주처였다.
지리산을 아는 사람들은 ‘천은사로부터 시작해 상선암, 우번암, 종석대, 성삼재’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다. 조금 멀리는 반야봉 밑의 묘향대까지. 그 길은 수행자의 길이고, 은둔자의 길이다.
“천은사는 샘(천泉)이 숨은(은隱) 절(사寺)이잖아요? 제 나름대로는 ‘지혜로운 자가 숨어 들만한 곳’으로 해석해요. 깨친 이후 자신을 탁마하는 보림(保任)이 있듯, 천은사가 피로에 지친 현대인에게 편안한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대진 스님은 천은사를 찾는 이들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한옥 툇마루에 편안히 앉아 머물다 가기를 원한다. 보제루 현판이 걸린 누각에 올라가 누구나 쉬기를 권한다. 그곳에 걸린 글과 그림을 보면서.
“천은사를 방문하는 사람은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는 텅 빈 마음이 됐으면 합니다. 천은사가 지리산의 관문인데, 지리산이 모두를 포괄하는 어머니 산이 듯 천은사는 관문에 들어선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본디부터 지리산의 관문이었던 천은사는 이제는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이 되고 있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