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왕의 뜻을 받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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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왕의 뜻을 받들다
  • 김남희
  • 승인 2022.05.26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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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아비의 극락왕생을 빌다
<주부자시의도>, 1800, 견본담채, 각 40.5×125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김홍도가 정조에게 진상하기 위해 주자의 시를 그린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 8폭 병풍. 그중 6폭이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돼 있다. 이 병풍을 본 정조는 “김홍도가 주자의 뜻을 깊이 얻었다”며 폭마다 시로 화답할 정도로 극찬한 작품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자식을 얻었다. 뛸 듯이 기뻤다. 그것도 잠시, 눈을 뜨니 꿈이었다. 나이 48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며칠 전 공정산(公正山) 상암사(上菴寺)에서 본 불상이 생각났다. 상암사로 향했다. 빛바랜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박락된 탱화에 색을 올리며 사찰 곳곳을 보수했다. 그 후, 꿈은 현실이 됐다. 아들 긍원(肯園) 김양기(金良驥, 1792~1842년경)를 얻은 것이다. 

단원(檀園) 김홍도가 시주한 이야기다. 이 내용은 「연풍군 공정산 상암사 중수기(延豊郡公正山上菴寺重修記)」에 전한다.

 

용주사 <삼세불탱화>를 조성하다

김홍도는 정조(正祖, 1752~1800) 덕분에 상암사와 인연을 맺었다. 1790년 화성 용주사 <삼세불탱화(三世佛幀畵)>와 이듬해 10월 정조 어진의 동참화사로 참여한 김홍도는 순조롭게 임무를 마친 대가로, 충청도 연풍 현감으로 제수받는다. 1792년 1월 부임한 그해에 연풍에는 기근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가뭄으로 농사마저 지을 수가 없었다. 김홍도는 영험한 공정산 상암사에 기우제를 지내러 갔다. 상암사를 둘러보니, 불상은 빛이 바랬고 탱화는 색채가 떨어져 있었다. 이를 본 김홍도는 시주하여 상암사를 중수하게 했다. 

풍속화로 알려진 김홍도는 사실 <신선도(神仙圖)>를 그려서 이름을 얻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서, 큰 화업에 대거 참여했다. 세 차례 왕의 어진 제작과 용주사의 <삼세불탱화>를 조성하는 데 혼신을 다했다. 왕실에서 거행하는 주요 행사를 그림으로 기록한 『의궤(儀軌)』와 《화성능행도8폭병풍》을 화원들과 제작했다. 이후, 불교를 주제로 한 보살도와 노승을 그린 작품을 그렸다. 

『영조국장도감의궤』, 상권 부분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김홍도, 신한평, 김후신은 반차도(班次圖)에 보이는 왕의 시신을 실은 가마인 대여 지붕과 발인 행렬이 들고 있는 깃발, 관 위를 덮는 구의에 보불화를 그렸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11세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정조의 정치는 당파간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한 탕평책이었다. 수도 한양을 화성(지금의 수원)으로 천도하는 계획을 세웠다. 먼저 화성에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한 절을 지었다. 1790년 2월 용주사 터를 닦고 불상을 모셨다. 9월에는 대웅전에 후불탱화를 조성했다. 김홍도는 당대 유명한 화원 화가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 1745~1824)과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 그리고 화승(畵僧)들과 <삼세불탱화>를 제작했다.

<삼세불탱화>, 견본채색, 348×417.7cm, 화성 용주사 소장

후불탱화는 대웅전에 모셔진 본존불 뒷벽에 있는 탱화를 말한다. 후불탱화는 석가모니가 인도 기사굴산(영취산)에서 10대 제자와 대중을 모아놓고 설법한 광경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용주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후불탱화는 <삼세불탱화>로, 약사여래불과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및 그 권속들을 그렸다. 이와 같은 도상은 규모가 큰 사찰에서 삼세불(三世佛)이나 삼신불(三身佛)을 각각 따로 그려서 3폭을 봉안하는 것이 18세기에 유행했던 후불탱화의 양식이었다. 19세기가 되면 삼세불과 삼신불을 1폭에 그린다.

용주사 <삼세불탱화>는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상단에 위치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 푸른색 연화좌에 앉아 있다. 부처의 정상계주에서 두 갈래의 빛이 높게 올라 천상의 세계를 밝힌다. 부처의 광배 뒤로 흰색 바탕에 붉은색 선을 그려서 꽃처럼 피어오르게 하여 부처의 공간을 성역화했다. 그 뒤로는 제자와 용녀, 용왕, 제석천왕, 대범천 등 대중의 얼굴을 배치했다. 

하단에는 연꽃을 든 문수보살과 여의(如意)를 든 보현보살이 있으며, 그 뒤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6대보살이 부처를 보좌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손가락을 모은 가섭과 경책을 들고 있는 아난이 상반신만 드러냈다. 사방을 수호하는 사대천왕이 큰 눈을 부라리고 있다. 

<삼세불탱화>는 인물의 얼굴과 옷, 여러 기물이나 장식을 세밀하게 표현해 입체적이다. 협시보살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중앙에 있는 부처의 시선은 약간 아래로 처리해서 중생을 굽어살피게 했다. 10대 제자와 그 외의 권속은 얼굴만 그려서 원근감을 표현했다. 시선의 방향을 다양하게 처리해서 오케스트라를 연상케 한다. 적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채색한 도상은 밝고 선명하다. 이러한 특징은 궁중의 화원들이 대거 참여한 결과로 보인다. 

 

『원행을묘정리의궤』 화성행차 반차도 중에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을묘년(1795년)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의궤로, 현륭원(융릉)과 수원 화성을 8일간 다녀와서 만든 행차 보고서다. 김홍도의 지휘 아래 도화서 화원들이 그렸다. 정조 대왕이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가마 뒤에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다. 어진을 제외한 그림에 왕의 형상을 그리지 않는 관례로 그림에 그리지 않았다.  

정조의 효심을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담다

세월이 흘러, 정조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화성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한다. 1795년 윤 2월 28일 사도세자의 회갑에 맞춰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현륭원에 가는데, 김홍도에게 이 행사 기록을 맡긴다. 그래서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화성 현륭원에 다녀온 8일간의 행적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제작한다. 목판에 그린 『의궤』는 28일부터 시작해 2년 후 완성된다. 

의궤에 참여한 화원은 김득신, 이인문 등이었고, 김홍도는 그림을 주관하는 화원이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만들기 시작한 지 1년이 되는 해에 원행의 내용 중 대표적인 장면 여덟 가지를 뽑아서 《화성능행도8폭병풍》을 먼저 제작했다. 

김홍도·김득신 등 합작, 《정조의 현륭원 행차(화성능행도)》, 각 66.4×15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화성능행도》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초해 김홍도를 따르던 김득신·최득현·이인문 등에 의해 병풍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화성능행도병풍》은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화성능행도8폭병풍》 중 <한강 배다리>는 정조의 행렬이 한강을 건너는 장면이다. 다리는 배를 맞대어 만들었다. 대규모 인원의 도강이 장관이다. 행차를 떠나보내는 신하들이 궁궐 앞에서 배웅하고, 강 건너에는 신하와 백성들이 정조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다.

<시흥행궁으로 가는 행렬>에는 군사와 신하, 왕을 수호하는 병사들이 지나간다. 선두에는 깃발을 들고 가거나 말을 탄 병사들이 행렬을 이룬다. 그리고 시흥에 있는 궁은 묘사가 자세하고, 인물은 동적인 모습까지 생생하다. 사실적으로 그린 산세와 숲이 실감을 더한다. 기록화이지만 화원들의 기량 덕분에 산수화를 보는 듯 그림이 생생해졌다. 당시 수원의 모습과 백성들의 생활상까지 담았다. 김홍도는 인물화와 산수화, 풍속화가 함께하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원만하게 마친다.

 

『부모은중경』 목판본 도상을 그리다

정조가 다시 김홍도를 부른다. 아버지를 위하여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設大報父母恩重經)』의 목판본을 새로 그리라는 명을 내린다. 정조는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어머니를 받들고 오른쪽 어깨엔 아버지를 받들고 살가죽이 닿아 뼈에 이르고 뚫어져 골수에 이르기까지 수미산을 백천 번 돌더라도 부모의 깊은 은혜는 다 갚지 못하느니라”는 구절에서 멈춘다. 기구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와 파란 많은 삶을 산 어머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수미산을 돌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중에서, 1796, 종이에 먹, 화성 용주사 소장

1796년 5월 김홍도는 목판 그림을 완성하고, 인쇄해 용주사에 보관한다. 『부모은중경』이라고도 하는 이 경전은 부처가 ‘부모의 깊고 높은 은혜를 헤아려 자식이 부모에게 보은해야 할 것’을 설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14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열두 번째의 장면 <수미산을 돌다>는 자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양쪽 어깨에 들어 올려 수미산을 백천 번을 돌아도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변상도(變相圖)이다. <수미산을 돌다>에는 파도가 몰아치는 가운데 거대한 산이 우뚝 솟아 있다. 자식이 부모를 업고 산 아래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중이다. 험악한 산의 높이를 가늠할 수 없다. 정상에는 세 명의 부처가 부챗살처럼 빛을 비추고 있다. 극락세계다. 하늘에는 신비한 구름이 휘몰아쳐 신령스러움을 자아낸다. 기존의 『부모은중경』은 목판본이 있긴 하지만, 김홍도와 궁중 화원들이 그린 용주사본의 변상도가 창의적이고 회화적이라 완성도가 높다. 섬세한 관찰력으로 세밀하게 그린 용주사본은 이후 널리 보급됐다. 

김홍도가 56세가 되던 해에, 정조가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김홍도는 실의에 빠진다. 정조의 응원에 힘입어 용주사 <삼세불탱화>를 조성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와 『부모은중경』 목판본 도상을 그릴 수 있었다. 화성 천도에 대한 계획에 밑그림을 그리며 정조의 눈과 귀가 되어 보필했다. 화가로서의 인생도 저물고 있었다. 정조가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었듯이 김홍도는 정조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참고문헌
김정희, 『불화-찬란한 불교 미술의 세계』, 돌베개, 2009
월운 옮김, 『부모은중경』, 지영사, 2005
유홍준, 『화인열전 2』, 역사비평사, 2001

 

김남희
계명대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조선시대 감로탱화에 나타난 시간성과 공간성 표현에 관한 연구」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옛 그림을 본다는 것』(2021), 『야단법석 괘불탱화』(2020), 『옛 그림에 기대다』(2019), 『극재 예술혼에 취하다』(2018), 『조선시대 감로탱화』(2018), 『일본회화 특강』(2016), 『중국회화 특강』(2014), 『한국미술 특강』(2012)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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