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한경용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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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한경용 ‘항아리’
  • 동명 스님
  • 승인 2022.08.16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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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항아리
_한경용

항아리 속에 100년의 바람이 불어온다
살을 에는 바닷바람으로 살아가는 섬마을
육지로 드나들며 항아리 상자로 사놓은 밭 마지기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은 아들들
육지에서 망한 딸 기다리며
꼬박꼬박 담아놓은
보리랑 좁쌀이랑 콩이랑 삼짓돈
곳간 속에 밤하늘의 수심을 모은 항아리가 있다
느슨 밤 파도 소리 들으며 깎아 먹던 씨고구마
그 맛은 할머니 젖처럼 달콤하다
월사금 내는 날에는
컴컴하고 둥근 하늘로
거꾸로 잠수하여 꺼내주던
내 어린 날의 전설
뒤란에 가면 거미줄 사금파리
빗물 고인 항아리가 있다.

(한경용 시집 ‘고등어가 있는 풍경’, 서정시학 2021)

[감상]
항아리가 굴러다니는, 더 정확히 말하면 깨진 항아리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북한산 중흥사에는 옛날 화장실에서 썼던 엄청나게 큰 옹기가 있었고요. 그 외에도 오래된 항아리들이 빗물을 받아서 미생물들을 기르곤 했습니다.

한경용 시인의 옛집 뒤란에도 빗물 고인 항아리가 있습니다. 위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고요. 일부는 떨어져서 사금파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쓰레기에 불과하고 시간이 더 지나면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항아리는 나름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살았던 조부모님은 육지를 드나들며 항아리 장사를 했습니다. 항아리 장사로 번 돈으로 밭 몇 마지기를 샀지요. 밭에서 나온 보리랑 좁쌀이랑 콩을 항아리에 보관하면 쉽게 상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할머니는 항아리에 쌈짓돈과 밤하늘의 수심도 모았습니다. 파도 소리도 집어넣었고, 파도 소리와 함께 씨고구마를 넣어서 먹으면 달콤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할머니, 월사금 주세요.”

손주가 손을 내밀면, 할머니는 항아리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고는 돈을 꺼내주었습니다.

항아리들은 가족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담고 지금은 폐허 속에 누워 있지만, 한때는 참 유용한 보물단지였습니다. 오늘은 지금은 폐물이 된 한경용 시인의 항아리를 살짝 들여다보았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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