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사찰로
제주 불자들은 관음사 김문자(86세, 백련화) 신도회장을 ‘제주 불교의 대모’라 칭한다. 조계종 교구본사 관음사의 신도회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주의 사찰과 신행 단체 곳곳에 김문자 회장의 손길이 뻗쳐 있기 때문이다. 갓 서른이 넘은 1969년부터 진행한 봉사활동, 특히 제주 삼광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덕희봉사회’ 활동은 김문자 회장의 삶 그 자체다. 이런 연유로 2022년 조계종 포교원에서 시상한 포교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김문자 회장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까지는 오빠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찬양대 활동도 열심히 했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성모 마리아 역할로 연극을 올리기도 했다. 교회를 다니던 여학생이 어떻게 제주 불교의 대모가 됐을까?
“어머니는 독실한 불자였지만, 교회를 못 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교회에서 세례만큼은 받지 마라’ 하셨죠. 여자니깐 결혼 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생각하셨던 거죠.”
어머니는 관음사를 다녔고, 원명선원을 창건할 때 도움을 준 독실한 불자였다. 결혼한 시댁 역시 불자 집안이었다. 시댁 모두 관음사를 다녔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절에 발을 디뎠다. 30대 초, 같은 나이대 여성 불자 15명 정도가 모여 관음회라는 모임을 창립했다. 관음회 도반들과 함께 관음재일 법회는 꼭 참여하려 했다. 당시 관음사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한라산 밑자락에 있는 산천단에서부터 걸어 올라야 했다.
어느 겨울 눈 내린 날, 비닐로 신발을 묶고 관음사에 올랐더니 스님으로부터 “이런 날 어떻게 왔냐? 사고 나면 더 큰일이다. 부처님은 어디나 항상 계시니 집에서 경전을 읽고 기도해도 좋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불교의 습기에 젖어 들었다. 그러면서 ‘여기가 내가 안주하고 다녀야 할 곳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봉사활동
신앙생활과 함께한 것이 봉사활동이다. 부모 잃은 아이,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이들로부터 시작해 근래에는 새터민과 다문화가정 활동까지 김문자 회장의 손이 뻗쳤다.
“제주도민의 삶은 전쟁 때 피난민보다 어려웠습니다.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었죠. 적십자 부녀봉사회에 가입해 양로원, 소년원, 보육원, 특수 학교를 다니며 봉사했습니다. 냇물에다 이불 빨래를 했고, 환센병 환자를 방문하곤 했죠.”
1969년 적십자 활동으로 시작한 봉사활동은 50년 넘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후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부회장을 거쳐 전국 중앙위원까지 역임했다.
2003년에는 ‘제24회 만덕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만덕은 제주를 넘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여성 상인이다. 1795년 큰 태풍이 제주를 강타해 기근에 시달릴 때, 자기 재산을 털어 제주인들을 구휼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제주 여인이다. 그만큼 명예로운 수상이고, 실천력이 있어야 가능했다. 현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불교계 봉사활동도 꾸준히 했다. 불교 봉사활동의 성과가 이어져, 1992년 관음사에서 제주불교사회봉사회를 창립했고, 김문자 회장은 창립 초기 6년간 회장을 맡았다. 바자회를 개최해 수익금을 독거노인과 요양원 활동에 지원했다.
“봉사활동을 짧고 굵게 하기보다 가늘고 길게 합니다. 저희보다 잘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그들에게 역할을 맡기고 저희는 다른 일을 찾죠.”
김문자 회장이 불교 봉사활동을 하면서 세운 원칙이다.
덕희 보살과의 인연
부모님, 시댁 어른과의 인연으로 불문에 들어섰지만, 또 한 명 중요한 사람이 고(故) 임덕희 보살이다. 덕희 보살이 불연을 깊게 맺은 것도 남다르다. 덕희 보살의 남편이 일본에 머물 때 병이 났다. 한·일 미수교 시절이어서, 덕희 보살은 배에 의존해 밀항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이 배에 타고 있는 이들을 살려주면 꼭 관세음보살님의 은덕을 갚겠다”라고 기도했다. 이후 일본에 머물면서 재일조선인들을 위한 여러 활동과 기념사업을 전개했고, 일본에서 화주(化主)를 해 제주 지역 사찰의 창건과 중수에 큰 도움을 줬다. 말년에는 제주에 머물면서 삼광사에서 신행 활동을 했다. 김문자 회장은 덕희 보살을 신행 활동의 선배로, 한편으로 불법의 의지처로 믿고 따랐다.
어느 날, 덕희 보살이 김문자 회장을 불러 “여기 삼광사 신도회장을 하라”고 제안했다. 김문자 회장은 “제가 관음사 부회장도 하고 있고, 관음사 스님한테 질책받습니다”라며 정중히 거절했으나, “일단 이름만 올리세요. 활동은 그곳에서 하고, 일은 여기 있는 사람이 할 테니 이름만 올리시라”라는 거듭된 부탁에 삼광사 신도회장도 맡게 됐다.
3년 뒤 덕희 보살은 세상과 인연을 다했고, 김문자 회장은 덕희 보살의 역할과 활동을 고스란히 떠맡게 됐다. 인터뷰할 때, 옆에 계시던 삼광사 주지 현명 스님은 “회장을 넘길 때부터 덕희 보살님의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라 거든다. 자신의 뒤를 이어 봉사활동을 이끌어 갈 사람에게 회장 소임을 넘긴 것이다. 삼광사와 김문자 회장은 뜻을 이어, 2004년 ‘덕희봉사회’를 조직했다. 덕희 보살님 기일 100재가 있던 날이다. 이렇게 김문자 회장에게 덕희봉사회는 남다른 단체다. 김치 나누기를 시작해 매년 5,000포기 김장을 담궈 독거노인을 비롯한 어려운 이들에게 나눴다. 김치로 시작해 된장과 밑반찬을 보시했다. 생산 불교를 지향하는 주지 스님과 함께 ㈜덕희식품도 만들었다.
현재는 관음사와 삼광사 신도회장으로 4·3 추모 및 봉려관 스님 계승사업, 한라산 영산대재, 붓다클럽 등 제주 불교의 대소사를 챙기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원력
“회사가 차량 운행과 관련이 있죠. 그런데 지금까지 사고 한 번 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업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죠. 남들의 시기와 질투로 어려움이 있기도 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있지 않았나 합니다.”
“어떤 힘으로 지금껏 일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서슴없이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이야기한다. 사실, 김문자 회장은 유복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50년을 넘어 60년 가까워지도록 봉사와 신행 활동을 이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 간의 갈등과 불교 내부의 어려움을 묵묵히 지켜봐야 하는 위치다.
“젊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제 신행의 중심은 관세음보살 정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정근을 하죠. 사찰에서 재를 올릴 때, 지장보살 정근을 하잖아요? 그때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다 나중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저를 보기도 하죠(웃음).”
시어머님이 연로하셔서 시중들 때, 하루에 1만 번씩 염하여 천일기도를 했다. 불법에 입문하게 해준 부모님과 시댁 어른, 관음사를 함께 찾은 관음회 도반,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실천한 덕희 보살과 삼광사. 모두가 김문자 회장 곁에 항상 있는 관세음보살님이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