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을 쥐고 수인(手印) 하는 손(<Holy make-up>), 언더붑 패션의 보살(<심호도_일광·월광>), 축 늘어진 남성을 피에타 조각상처럼 안고 있는 수월관음 도상(<심호도_낙류>)…. 박그림의 그림은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 고전과 현대, 불화와 현대회화라는 경계를 허물고 이종적인 것들을 아우르고 포용한다.
박그림 작가는 국내 최초 ‘성소수자 불교미술가’다. 그는 전통적인 불교미술에 퀴어적 요소를 결합해 동시대의 현대회화로 재탄생시킨다. 자전적 서사가 담긴 ‘심호도(尋虎圖)’ 연작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십우도(十牛圖)’는 자신의 본성을 찾는 수행 과정을 소를 찾는(심尋) 10단계로 묘사한 선(禪) 수행도다. 이 십우도를 모티브로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박그림 작가를 갤러리 띠오에서 만났다.
퀴어와 불교
박그림 작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불교미술학과에 합격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진학을 포기했다. 꿈을 포기할 수 없던 그는 불화 스승을 찾아갔다. 도제식으로 불교미술을 배운 뒤 또래보다 6년 늦은 나이에 동국대 경주캠퍼스(현 WISE캠퍼스) 불교미술학과에 입학했다.
“도제식으로 조선 탱화 형식을, 대학교에서는 고려불화 형식을 주로 배웠어요. 수월관음도를 좋아하는데, 특히 용왕 권속들이 등장하는 수월관음도와 ‘물방울 관음’이라 불리는 양류관음도를 좋아해요. 조선 탱화는 강렬한 색채로 사람들을 압도한다면, 고려불화의 수월관음도는 고즈넉한 고색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힘이 풍겨 나와요.”
불모(佛母)의 길을 걷고자 했지만, 그의 마음 한편엔 늘 내면의 정체성을 표출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재학시절에 들은 “이 시대에 맞는 불화를 그려야 된다”는 기민정 강사의 말이 그런 그의 욕망을 추동했다. 졸업 작품으로 종교화를 벗어나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표현한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첫 개인전 <화랑도(花郞徒)-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들>(2018)에서 선보인 ‘화랑도’ 연작으로 이어진다. ‘소’를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인 셈이다.
동문이었던 불일미술관 학예실장 여서 스님과의 인연으로 서울 법련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선보인 작품들의 주제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표출되는 게이 남성들의 나르시시즘’이었다. ‘퀴어’ 코드의 그림들에 관람객들은 ‘절에서 이런 그림도 전시하네, 좋아졌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퀴어라는 정체성을 담은 첫 개인전을 사찰 미술관이라는 이색적인 공간에서 선보이다 보니 주목받았어요. 어머니도 불자셨고, 살아오면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고향이 정읍이라 내려갈 때는 항상 내장사를 찾아요. 시간이 날 때는 주변의 가까운 절에 가서 기도드리고 향도 공양하고요. 그때마다 절과 스님들에게서 항상 따뜻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인지 제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첫 전시를 불일미술관에서 여는 게 조금은 더 편하게 다가왔죠. 불교는 모든 걸 다 품어내는 포용의 종교잖아요.”
박그림 작가의 그림에는 전통적인 불교미술 기법이 녹아 있다. 비단 뒷면을 채색해 은은하게 색이 배어 나오게 하는 ‘배채법(背彩法)’, 세필로 피부의 세밀한 부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전통 초상화법인 ‘육리문법(肉理紋法)’, 눈동자의 3분의 1을 눈꺼풀로 덮어 반원으로 보이게 하는 ‘반개법(半開法)’. 이러한 전통적인 화법으로 남성과 여성, 동양 설화와 서양 신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도상을 화폭에 담는다. 거기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도 공감하는 주제인 ‘인간관계’, ‘퀴어’, ‘정체성’ 등이 녹아 있다.
“심호도 연작 중 ‘낙류’를 보면 동양의 수월관음도가 떠오르는 동시에 서양의 피에타 느낌도 나요. 양가적이죠. 심호도라는 현대회화 연작으로 ‘불교미술은 고답적이고 고정적이다’라는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꼭 퀴어가 아닌 일반 대중도 제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본인한테 대입해 보며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요.”
호로(虎路), 호랑이의 길로
첫 전시 이후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전시를 이어갔다. 두 번째 개인전 <참; 가장무도회(CHAM; The Masquerade)>(2021)에 이은 세 번째 개인전 <호로(虎路), Becoming a Tiger <서울>>(2022)을 열었다. 이 전시에서 ‘간택(柬擇)’, ‘불이(不二)’, ‘낙류(樂流)’, ‘무아(無我)’ 등의 심호도(尋虎圖) 연작을 선보였다. 소년(목동)이 소를 만나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그린 선화(禪畵), 십우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심호도 연작에는 소(牛)가 아닌 ‘호랑이(虎)’가 박그림 작가의 페르소나로 등장한다.
“단군 신화에서 호랑이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존재예요. 산신도에서 등장하는 호랑이 역시 주변부적인 존재이지만, 영물로서 신앙적인 대상이 되기도 하죠. 그런 호랑이의 양가적인 모습이 저의 퀴어 정체성과 일치한다고 생각했어요. 사회에서 제 정체성을 밝히지 않았을 땐 ‘정상인’으로 대우받지만,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들과 섞일 수 없는 ‘비정상인’으로 낙인찍히기도 했거든요.”
심호도 연작에 등장하는 성별을 알 수 없는 보살들은 박그림 작가가 살아오면서 마주치는 인연들을 모델로 했다. 그들이 곧 작가에게는 불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안내하는, 본래의 자신을 찾도록 돕는 ‘보살’이자 ‘소’의 역할을 한다.
전시 제목인 ‘호로(虎路)’는 직역하면 호랑이의 길이지만, 호로자식이라는 은어로 읽히기도 한다. 심호도 연작에는 박그림 작가가 자기를 혐오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페르소나인 호랑이를 스스로 보듬어 안는 과정이 담겨 있다.
“화랑도 작업을 할 때만 해도 자기혐오가 심했었어요. 거울을 보면 항상 제 모습이 싫어서 얼굴을 막 때릴 정도였죠. 자기혐오는 부정적 자기애로 나르시시즘의 종류예요. 본인이 생각하는 기준은 높은데 현실에서는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니까 괴리가 생겨 본인을 싫어하는 거거든요. 그러다가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이 사람들은 당당히 자기를 표출하며 사는구나’ 그게 멋있고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화랑도에서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심호도에서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제가 직접 만나는 인연에 대해 느끼는 것들을 담았어요.”
심호도 연작 ‘춘수(春秀)’(2022)에도 그와 어머니의 관계, 인연이 담겼다. 항상 염주를 들고 기도하던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불일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이 열리기 1년 전에 돌아가셨다. 성소수자로서 본격적인 현대미술가로서의 행보를 알린 첫 전시였다. 그 점이 못내 안타까워서였을까, 작가는 이 작품에 어머니와 그의 이야기를 세 개의 장면으로 함축해 녹여냈다.
왼쪽 그림에는 마야부인의 모티브를 따와서 옆구리에서 태어난 호랑이를 그렸다. 오른쪽 면에는 염주를 든 여인이 호랑이 무늬가 상처처럼 새겨진 소년의 손을 잡고 있다. 퀴어로 청소년기를 보내며 받은 상처를 어머니가 묵묵히 기도로서 보듬는 모습이다. 중앙은 성인이 된 그를 보살이 된 어머니가 떠받쳐 안고 있다.
검은 소에서 점점 하얗게 변화하는 소처럼, 이 그림에서 그는 호랑이의 껍질을 벗고 어엿한 성인 남성이 되어 보살이 된 어머니의 품속에 평안히 안겨 있다.
“고백하진 않았지만, 제가 퀴어라는 걸 어머니도 아마 알고 계셨을 거예요. ‘춘수’는 퀴어라는 정체성의 자식을 둔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하며 작업한 작품이에요. 고향인 정읍과 경주를 벗어나 30대가 돼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때 관계가 넓어지면서 타인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서 결국 나를 제일 사랑해준 사람은 엄마였구나를 느꼈죠. 그런 어머니의 삶을 조금이나마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머니는 자식인 저를 깨달음으로 가는 하나의 순수한 생명체로 바라보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 작품은 제 주변 지인들과 그들의 가족 이야기이기도 해요. 자식이 게이라고 하면 주변에서 곱지 않은 시선들을 보내죠.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이 그림으로 위로하고 싶었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박그림 작가는 올 8월에 열릴 전시를 앞두고 작업에 매진 중이다. 이 전시에서 심호도 연작을 새롭게 변주해 선보일 예정이다. 새로운 전시를 열 때마다 따라붙는 “국내 최초의 ‘성소수자’ ‘불교’미술 작가”라는 타이틀을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 모두 불교적인 것과 제 정체성을 어떻게 현대미술로 표현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 ‘불교’, ‘성소수자’라는 수식어에 거부감은 없어요. 앞으로 해나갈 작업들이 많은데, 나중에는 또 다른 새로운 수식어가 생기겠죠. 그리고 저 부처님 되게 좋아하는데요(웃음).”
박그림 작가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잊히는 사소한 장면들에 관심이 많다”며 “앞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마주하는 사소한 장면들을 그려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는 불교의 가르침 한 구절을 덧붙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구절을 좋아해요. 요즘 세상에서는 이 말이 ‘이 세상에 나 하나 있다’ 뭔가 이런 자만한 말로 잘못 쓰이는 것 같아요. 부처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 있잖아요. 자신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며, 깨우침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요. 그런 점에서 이 말은 그 어떤 탄생 신화에서 나온 말보다도 극적이고 위대한 것 같아요.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 모두가 부처다, 우린 모두 존귀한 존재다, 라는 의미니까요.”
사진. 유동영
작품이미지 사진. 전상진(띠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