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소와 함께 살았다. 내 방은 쇠죽을 끓이는 방이었고, 벽을 사이에 두고 소와 나는 이웃했다. 소와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지만, 소는 그냥 나와 한식구였다. 소가 갑자기 떠나거나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애착하지도 않았고, 소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불편하게만 하지 않으면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소가 한식구라는 것은 묘하게 위안이 됐고, 강아지처럼 친하지 않으면서도 소가 내 방 옆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이 든든했다.
아버지는 형에게 매일 쇠꼴을 베어놓으라고 했는데, 형은 그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형이 도회지 학교로 진학한 후에 그 임무는 내 차지였으나, 나는 그 임무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쇠죽 쑤는 일은 좋았고, 외양간에서 소의 침대 역할을 하다가 거름이 되어가는 볏짚들을 꺼내서 마당에 너는 일도 곧잘 했다. 아버지가 쟁기질을 할 때면, 아직 길이 덜 든 소를 끌고 길잡이 역할도 했다. 소는 정말 말없이 내가 끄는 대로 나를 따라왔다. 소의 입장에서는 쟁기를 끄는 것이 힘들었을 텐데, 자신보다 조그만 아이가 끄는 대로 따랐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다.
몇십 년 전만 해도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종의 농기구였다. 소는 쟁기질을 해줬을 뿐만 아니라 써레질을 해줬으며, 수레를 끌어줬고, 볏짚을 깔고 누워 침대로 사용하고는 그것을 거름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농기구로서의 소가 필요 없어지는 농한기가 되면 아버지는 소를 팔고 송아지를 사 왔다. 소와 송아지의 가격 차이만큼 이익을 남긴 것이니 소는 재산증식 수단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화되기 이전에는 농업인구가 절대다수였다. 우리 문화가 농사짓는 데 필수적이었던 소와 친숙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선승들의 선시에도 소가 자주 등장한다. 선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의 관계에 비유해 10단계로 그린 십우도(十牛圖)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십우도와 다른 궤의 소가 등장하는 시도 아주 많다. 선시를 해석하다 보면 자연스레 십우도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글에서는 부러 다른 각도로 살펴보도록 한다.
아침에는 시냇가 언덕에서 풀을 먹이고
저녁에는 강가 방둑에서 풀을 먹이네.
지는 꽃이 적은 것에 애석해 하지 않고
다만 향기 좋은 풀을 찾을 뿐이네.
앞 시내 뒤 냇물에 안개비가 자욱하여
대삿갓에 도롱이 걸치니 피리 소리 청량해라.
소를 타고도 6, 7리가 멀기만 하니
송아지 재촉하는 소리가 두 번 세 번 퍼지네.
朝牧澗邊塢 暮牧江上坡 不惜落花少
但尋芳草多 前溪後溪烟雨橫 篛笠簔衣風笛淸 騎牛遠遠六七里 呼犢時時三兩聲
-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 「목동의 노래(牧童詞)」 전문
목동은 소에게 풀을 먹이는 임무를 안고 길을 나섰다. 아침에는 시냇가 언덕에서 풀을 먹였는데, 향기 좋은 풀을 찾다 보니 저녁에는 강가 방둑까지 갔다. 저녁이 되자 이제는 집에 갈 시간, 안개비가 자욱해 대삿갓에 도롱이 걸치고 피리 한번 청량하게 불어제끼고 소 잔등에 올라탔다. 소를 타고 가지만 6, 7리는 머나먼 길, 말[馬]이라면 순식간일 수 있지만, 이놈의 소는 도대체 서두르는 법이 없다. 이러 이러, 재촉하는 목동의 목소리가 두 번 세 번 마을을 향해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소와 목동의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린 시다. 백곡선사는 「봄날에 취미 장로에게 보내다(春日寄翠微長老)」라는 시에서도 “제비 돌아오고 매화는 떨어지는데/ 소는 누워 있고 풀은 푸르도다(鷰回梅落後 牛臥草靑時)”라며 비슷한 풍광을 그린다. 남녘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제비와 떨어지는 매화가 대비되는 가운데, 소는 한가하게 누워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푸르러지는 풀이 대조된다. 십우도의 소처럼 이 시들의 소도 한껏 상징화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향기 좋은 풀을 찾는 소처럼, 이 시의 향기를 느끼면 그것으로 시 감상은 충분하다.
소를 먹이는 이가 동자만이겠는가? 소를 먹이는 노인도 있다.
지난해 소 먹이며 언덕에 앉았을 때
개울가 녹음방초 실비가 내렸네
올해는 소고삐 놓고 언덕에 누웠나니
버드나무 그늘 밑 시원한 기운 감도네
去年牧牛坡上坐 溪邊芳草雨霏霏
今年放牛坡上臥 緣陽陰下暑氣微
-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소먹이 노인(息牧叟)」에서
소 먹이는 노인의 태도가 매해 달라지고 있음일까? 작년에는 언덕에 앉아서 소를 지켜보았다. 소고삐를 어떻게 했는지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다음 행으로 보아 소고삐를 어딘가에 매어놓았을 것 같다. 올해는 아예 소고삐 놓고 언덕에 누웠더니, 버드나무 그늘 밑에서 시원한 기운이 올라온다.
이 시의 소는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띤다고 하겠다. 소는 곧 노인의 마음이다. 작년에는 고삐를 매어서 마음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단속해야 했으나, 올해는 마음을 내버려둬도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고삐를 풀어놓아도 소가 노인을 멀리 떠나지 않듯이, 마음도 함부로 날뛰지 않고 있음을 노인은 알고 있다. 자신의 수행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게 선 선승의 넉넉한 여유가 느껴지는 시다.
그러고 보니 선승들은 소치는 목동과 노인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방목(放牧)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기암법견(奇巖法堅, 1552~1634)도 비슷한 성격의 목동과 노인을 그리고 있다.
방초 사이에 휘휘 늘어진 푸른 버들
소를 치며 종횡으로 가는 대로 놔둔다네
홀연히 새끼줄 놓고 종적이 사라졌음에도
목동은 쇠피리 들고 고산(故山)을 불어제끼네
綠楊芳草間離離 牧爾縱橫任所歸 忽放索頭無縱迹 閑將鐵笛故山吹
- 기암법견(奇巖法堅, 1552~1634), 「소가 없다(無牛)」
방초 사이에 휘휘 늘어진 푸른 버들이 선사의 마음이런가, 아니 목동의 마음이런가? 자신의 주장은 없이 중력이 시키는 대로 유연하게 늘어지는 버들가지가 선사의 느긋하고 넉넉한 성품을 말해주는 듯싶다. 소는 새끼줄 놓고 종적을 감췄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동은 쇠피리 들고 멋지게 한 곡조 뽑을 뿐이다. 기암선사의 「남녘 늙은이(南叟)」는 한술 더 떠 의복조차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채 소가 어디로 가든 말든 돌아가는 일조차 잊어버렸다.
소는 느긋한 성품의 상징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순종의 상징일까? 선사들의 시에 등장하는 소는 전혀 불쌍하지 않은데, 신경림 시인이나 김기택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소를 만나면 눈에 이슬이 맺힌다.
사나운 뿔을 갖고도 한 번도 쓴 일이 없다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고삐에 매여서 그는
뚜벅뚜벅 평생을 그곳만을 오고 간다
때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보면서도
저쪽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 신경림, 「뿔」에서
소의 일생을 보면 그렇다. 사나운 뿔을 갖고 있지만, 소싸움에 동원되는 소가 아니면 뿔을 활용하는 일은 거의 없다. 외양간에서 논밭까지 평생을 주인의 일터만을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소가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에게는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꿈 같은 것도 없다.
김기택 시인은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소」)라고 말한다. 소의 커다란 눈이 말하는 것이 현대시인에게는 화두가 되었음이다. 가끔 눈물을 흘리는 커다란 눈이 끔벅거리면서 뭔가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시인은 그것을 간파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이 볼 때 그 눈은 말을 가둬두고 있는 감옥이다. 그 감옥은 높은 벽이 있는 것도 아니요, 험상궂은 교도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감옥 속에서 소의 말은 탈출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옛 선사들은 소의 눈에서 ‘소의 말[言]’을 찾는 것은 소 등에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소가 불성을 상징한다면, 우리에게 이미 오롯이 갖춰진 불성을 찾는 것은 소 등에 올라타고서 소를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스워라, 소를 탄 사람이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다니
그림자 없는 나무를 찍어
바닷속의 거품을 모조리 태우노라
可笑騎牛子 騎牛更覓牛
斫來無影樹 銷盡海中漚
-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또(又)」 전문
선사들은 소를 타고도 소를 찾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상징적인 암시를 통해 끊임없이 가르침을 베풀고 있건만, 여전히 우리들은 그림자 없는 나무를 찍어서 그 나무로 바닷속의 거품을 모두 태우려 한다. 그림자 없는 나무도 없거니와, 설사 그런 나무가 있다 하더라도 바닷속의 거품을 없앨 불을 피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기왓장으로 거울을 만들려는 일이며, 진흙소를 타고 바닷속을 잠수하겠다는 무모한 모험이다.
최승호 시인은 1987년에 『진흙소를 타고』라는 제목의 시집을 냄으로써 시단에 잔잔한 충격을 줬다. 진흙소가 선가에서 나온 것인 줄 모르는 사람들은 ‘진흙소를 탄다’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아서 충격이었고, 진흙소가 선가의 화두 속에 등장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시집의 내용이 불교적이라기보다는 자못 고통스러운 사람들 혹은 현대 문명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 충격이었다.
진흙소는 소 아닌 소다. 선가에는 소 아닌 소가 많다. 철우(鐵牛), 무쇠소, 나무소, 돌소 등, 그중 물에 약할 것 같은 진흙소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바다나 호수에 뛰어드는 진흙소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해서가 아닐까?
옛길은 분명히 발아래로 통하는 것을
스스로 미혹하여 다겁 동안 헤매었네
천지가 생겨나기 전으로 훌쩍 건너가니
뿔 부러진 진흙소가 눈 속으로 달려가네
古路分明脚下通 自迷多劫轉飄蓬 翻身一擲威音外 折角泥牛走雪中
- 소요태능, 「의신난야에서 쓰다(義神蘭若夜坐書懷)」에서
가야 할 길이 발밑에 펼쳐져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선사는 천지가 생겨나기 전으로 훌쩍 건너가, 다시 말해 근원의 근원으로 들어가 진귀한 풍경을 보게 된다. 뿔 부러진 진흙소가 눈 속으로 달려가는 모습이다. 뿔 부러진 진흙소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없는 것’을 꿈꾸면서, 아니 이미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찾으면서 살고 있다.
맑고 맑은 푸른 하늘 해와 달 앞에서
맑은 바람 어찌 다시 인연에 의지하리
나무사람 허공의 성품 범하지 않고
한밤중에 소를 타고 옥천을 건너가네
湛湛碧天日月前 淸風那更借因緣
木人不犯虛空性 夜半騎牛渡玉川
- 무경자수(無竟子秀, 1664~1737), 「조사선(祖師禪)」에서
‘인연’이란 곧 유위법(有爲法)이다. 푸른 하늘과 해와 달은 어느 것에도 걸림 없는 청정한 허공의 성품을 상징한다. 허공의 성품을 범하지 않을 이가 있을까? 유위법, 다시 말해 인연법에 매여 있는 존재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이 ‘나무사람’이다. 나무사람은 ‘없는 사람’이다. ‘없는 사람’이란 곧 유위법이 아닌 무위법을 뜻하므로, 그는 허공의 성품을 범하지 않고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타고 가는 것이 하필 ‘소’일까?
선사들의 선시에 등장하는 소는 현실로 존재하는 소라기보다는 제자들의 견성을 촉구하는 방편적인 상징이다. 선사들이 소를 견성을 촉구하는 촉매로 활용한 이유는, 소가 농업을 근간으로 삼았던 민족에게는 그만큼 귀하면서도 소중하고 친숙한 가족 같은 동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쇠죽 쑤기 위해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되새김질하던 소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소가 아니다. 그는 우리집에서 일소가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하다가 가장 아름다운 몸매였을 때 우시장을 거쳐 어디론가 갔다. 다른 집으로 가서 일을 더 호되게 했을 수도 있다. 혹은 도살장으로 끌려가 목숨마저 사람들에게 바치고, 고기는 고깃집으로, 가죽은 가죽 만드는 공장으로, 뼈다귀는 설렁탕집으로 산산이 흩어져서 사람들의 입이나 옷이나 소파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쓸모없었지만, 그에게는 나름 패션이기도 했던 뿔은 신경림 시인의 예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졌을까?
친숙한 가족이기도 했던 소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소는 고기나 우유를 제공하는 무생물과 같은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시 속에서나마 소가 인간의 친숙한 가족으로서, 본성을 찾아가는 길을 가리키는 나침반으로서, 또는 진리의 상징으로서 생생하게 살아 있기에, 끝내 고기나 우유를 만드는 기계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동명 스님
시인. 잠실 불광사 주지, 조계종 교육아사리. 저서로 『조용히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 『불교 기도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