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50주년을 맞아 김성동, 권순범 두 분과 월간 「불광」의 방향을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으로 100년을 위한 초석을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지난 9월 초 텃밭에 심은 50여 개의 배추 모종이 모두 사라졌다. 매년 배추 모종을 심어 노랗게 꽉 찬 배추를 수확했기에 많이 당황했다. 이상 기후로 3~4일간 30도가 넘는 강렬한 햇볕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물 공급이 부족했을까. 너무 어린 모종이었나. 비료가 부족했나. 햇빛 가림막을 해야 했나. 분명한 점은 그 시간, 그 상태, 그 배추 모종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배추 한 포기가 자라는 데에도 수많은 관계와 연결의 지점들이 있다. 배추 한 포기뿐인가. 이 세계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 사람뿐 아니라 유정들도 무정들도 그러하다. 모든 존재는 연결되고 관계되며, 그 연결과 관계가 상호 의존하며 이어갈 때 향상이 일어나며, 그 연결과 관계가 막히거나 끊어질 때 문제가 일어난다.
잡지 불광은 지난 50년 동안 불교와 사람을 연결하고 관계 맺기를 끊임없이 행했다. 광덕 스님이 강조했던 “법을 전하고 보현행원을 실천해야 한다”, “사회와 역사를 책임져야 한다”라는 말씀도 다른 표현이지만, 뜻은 그러하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 “실천”과 “책임”은 엄중하게 말하면, 의무가 아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미 조건 지어진 관계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행위다. 스님이 부처님을 “법의 구체적 행동자”라고 표현한 것도 불교는 세상의 모든 생명과 연결되고, 필연적으로 관계 맺어야 하는 것을 보여준다. 1974년 11월, 서울 대각사 골방에서 만들어 낸 74쪽짜리 잡지 불광에 새겨진 행원도 그러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를 기준으로 잡지를 만들어왔고, 모자란 대로 그 역할을 이어오며, 그 뜻을 향상시켜 왔다. 우리가 이미 경험했듯이 이 행원은 교단 속의 개인과 사찰 공동체에 자비, 참회, 연민, 인내, 관대함, 친절, 겸손, 하심 등의 단어로 뿌리내렸다.
광덕 스님은 인터뷰에서 “그 여건과 상황에서 월간 「불광」을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밀려오는 압력을 막을 수가 없었지요”(1994년 11월호)라고 밝혔다. 1970년대는 그러했다. 1962년 통합 종단이 세워지면서 종단 안정과 인재 양성, 전법이 큰 숙제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이를 구현하는 일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가시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했다. 광덕 스님은 종단 총무부장 소임(1971.1.~1974.1.)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월간 「불광」을 창간하고, 도심 전법의 모형인 불광사를 창건한 것이다. 1973년 무렵, 남양주 보현사에서 3일 동안 홀로 종단 현실을 참회하며 눈물을 흘렸던 일도 월간 「불광」과 불광사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불광과 불광사는 교단 현실, 스님의 참회, 대중의 요청 등이 연결된 필연의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붓다·고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후, 다르마(Dharma, 법法)를 전할지 말지 잠시 망설였던 것을 경전에서는 범천(梵天)의 간청 때문이었다지만, 이는 극적 장면이 서사적으로 기록된 것일 뿐, 고타마 붓다는 다르마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필연성이 내재한다. 다르마의 본질은 길을 가는 것이기에, 길을 간 것일 뿐이다. 기수급고독원에 머문 것은 길을 가기 위해 머문 것일 뿐이다.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르마의 에너지가 작동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수많은 선지식이 그러하듯이 길을 갈 뿐이다. 왜냐하면, 붓다는 “법의 행동자”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당시 인도의 사문들이 얻고자 했던 그것과 달랐다. 나(我)와 신(神)의 합일을 꿈꾸었던 바라문들의 범신론도 아니었고, 인간은 죽으면 그만일 뿐이라는 신흥 사문들을 넘어섰다. 고타마 붓다에게 브라만의 숙명론과 이를 대척한 외도 사문들의 우연론, 무인론, 단멸론, 유물론 등은 길이 아니었다. 사문들이 빠져 있던 고행도 아니고, 자기 탐닉도 아니다. 상견(常見)이며 단견(斷見)일 뿐,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바른 길이 아닌 것이다.
붓다는 출가해 깨달은 이후 40여 년 동안 인도의 북부와 중부 지역 대부분의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니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지 가르쳤다.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경전은 괴로움을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로 적고 있다. 고고는 심신으로 직접 겪는 고통을 말한다. 배고프거나, 누가 나를 때리거나, 누가 나에게 모욕감을 주거나 등등 직접적인 물리적 정서적 고통을 말한다. 괴고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데, 변해서 나타나는 고통, 사라지는 고통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배신당한 것,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갑작스러운 경제적 파산도 그렇다. 행고는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의 고통을 말한다. 혜가선사가 말했던 그 불안한 마음, 그것 말이다. 이 삼고(三苦)의 고는 축적(집)되는 경향이 있으며, 서로서로 자주 겹치며 나타난다. 괴로움에 관한 바른 통찰은 4성제, 즉 괴로움이 있다(고苦), 괴로움의 원인이 있다(집集),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멸滅), 괴로움을 멸하는 길이 있다(도道) 등의 틀로 체계화된다.
연기
붓다의 연기법에서 중요한 맥락 중 하나는 상호의존적 관계성이다. 당대를 지배한 사상과 치열한 논쟁과 대화를 통과한 길이며, 중도의 길이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어릴 때 벌레와 새의 먹이 사슬을 본 그 예민함은 성장하면서 사회의 계급과 차별을 명확하게 볼 수밖에 없었으며,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며 일어난다는 진리는 사회적으로 모든 차별을 넘는 평등과 생명의 존엄성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태어남에 따라 신분, 생활, 계층이 나눠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신분도 넘어서며, 성별도 차별하지 않고, 승단으로 출가도 가능했다. 유능한 바라문이었던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붓다의 제자가 된 것도 당시 짧은 기간 동안 불교 승단이 얼마나 강력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사찰의 초입에서 만나는 불이문의 불이(不二)는 연기, 중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 문을 통과할 때 이미 붓다의 교설을 듣는 것이다. 바라문과 외도 사문의 무명과 결별하는 것(立此門來입차문래 莫存知解막존지해)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바라문은 무엇이고, 우리 시대 외도 사문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들은 이런 의문을 한번은 가져봤다. 왜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부자로 태어나는가, 어떤 사람은 열등하고 어떤 사람은 우등한가, 어떤 사람은 병이 있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는가, 이것은 우연인가, 신이 결정한 것인가 등의 의문 말이다. 불교는 명확하다. 모든 존재는 행위(업)의 상속자다. 우리의 과거 행위, 현재 행위로 모든 존재가 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그 행위(업)은 연기(緣起)로 얽혀있기에 복합적이며, 중층적일 수밖에 없다. 눈으로 보이는 행위가 있지만, 우리가 육근(六根)으로 직접적인 체감을 할 수 없는 행위도 있는 것이다. 바라문교의 카스트와 카르마는 당시 사람들의 삶을 결정론으로 억압했지만, 고타마 붓다가 제창한 업설은 대중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의 향상을 생각하게 했다. 『금강경』에 새겨진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은 이를 다시 알려준다. 과거는 떠났고, 미래는 오지 않으며, 현재를 관찰해 가는 것이다. 지금 더 나아가야 한다. 지금 더 용감하게 삶을 사는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고 더 나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금, 여기, 이 순간’은 새로운 인식과 평정을 주지만, 그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지금, 여기, 이 순간’의 현실 속 일상은 복잡하고 번뇌스럽다. 어떻게 지속적인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선지식은 여기에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가.
업·윤회
윤회는 업과 동전의 양면이다. 많은 경전에는 붓다가 많은 생을 윤회해 왔다는 것을 밝힌다. 붓다뿐 아니라 그의 아라한 등 제자들도 전생을 기억하고 있음을 거론한다. 윤회한다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붓다의 많은 과거생은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생이다. 붓다도 과거의 행으로 현재에서 업을 받았다는 경전의 기록도 그런 뜻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윤회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며, 당연히 깨달은 붓다에게 윤회는 없는 것이다. 이를 일반 대중과 불교인에게 “윤회는 없다”라는 문장 그대로 전달한다면, 윤회가 있다, 없다는 혼란만 던질 뿐이다. 그 혼란은 때에 따라 ‘단멸론’으로 빠지며, 윤리성을 잃어버리는 결과로 나타날 위험이 높다. 유무(有無), 시비(是非)를 다투고자 하는 대중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 유혹은 알다시피 명리심(名利心)을 일으킨다. 문제는 현실에서 갈애와 번뇌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 인간의 삶이다. 붓다께서 왜 14무기(無記, 붓다가 대답을 거부하고 침묵한 14가지의 질문)로 이를 경계했겠는가.
보시·연민
보시의 공덕은 많은 경전에 다양하게 등장한다. 보시를 행하는 자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호의를 받고, 선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훌륭한 명성이 퍼져나간다며 그 공덕을 말한다. 수닷타 장자의 보시로 큰 부자가 된 사례, 흉년든 마을의 촌장에게 보시하고 마음을 닦으면 재물이 풍족해진다고 설한 이야기 등 많은 장면이 등장한다. 경전은 물질적인 것 외에 친절을 베풀고, 좋은 말을 하는 것, 지혜를 닦는 것 등도 보시로 보고 있다. 이 모든 보시가 가리키는 공덕은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된다는 것이다. 보시가 재물을 일으킨다는 것을 ‘작은 효과’라고 보면, 재물뿐 아니라 지혜를 일으킨다는 것을 ‘큰 효과’일 것이다. 재가자에게는 ‘작은 효과’를 경험한 후 ‘큰 효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 중 중요한 것이 바로 ‘보시’임을 일깨우는 것이 중요하다. 육바라밀의 가장 첫 행동이 ‘보시’인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실제 보시를 꾸준하게 해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작은 효과’와 ‘큰 효과’를 모두 경험한 분이 적지 않다. 왜 ‘보시’가 ‘바라밀’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보시바라밀, 우리는 이를 직접 경험하고, 믿고 있는 것일까.
불교는 자비와 연민의 종교일 수밖에 없다. 연민은 다른 생명, 다른 사람이 나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우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이 연결돼 있다는 것을 자기 내면에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선지식들은 이 생명의 연결성을 보는 것, 연민과 공감력은 대부분 꾸준한 연습과 훈련으로 밝아진다고 했다. 그 훈련은 명상, 참선, 마음챙김 등 여러 단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연민과 공감력이 높은 사람은 매우 깊은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자비희사(慈悲喜捨)는 이를 구현한 단어다. 연민의 확장을 방해하는 것은 무한경쟁심, 분노심, 더 많은 소유욕 등과 같은 마음이 연민심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행동 없는 연민은 동정이며, 우월감의 표현일 뿐이다. 연민으로 이름할 수 없다. 연민은 필연적으로 행동을 동반한다. “붓다는 법의 행동자”이기 때문이다. 선지식들은 우리들이 연민으로 활동하면, 더 긍정적인 사람들, 더 친절한 사람들, 더 관대한 사람들이 우리들의 삶에 들어오는 걸 발견한다고 말한다. 달라이 라마가 “나의 종교는 친절입니다”라고 말한 뜻도 여기에 있다. 영문 불교 잡지 「트라이시클(tricycle)」의 미얀마 군부 쿠데타와 관련한 어느 미얀마 신도의 인터뷰에는 연민이 어떻게 연결, 확장하는지 알 수 있다. 미얀마에서 인도주의 네트워크 활동하며,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의 신념은 단호하다. “저는 군인들에 대한 증오나 분노 없이 활동합니다. 다르마에 따르는 길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르마를 실천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탈종교의 파고는 이미 높다. 제도로서의 종교도 길을 잃었다.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2004년에 55%, 2022년에 37%가 종교인구다. 그중 불교인은 16%다. 특히 20대, 30대의 무종교는 75%에 이르며, 이는 2000년 이후 일관된 통계로 나타난다. 탈종교가 앞으로 계속될 것이란 뜻이다. 제도 종교가 급속하게 외면되고 있는 현실은 사찰 법회, 행사 등에 참여하는 신도의 수를 직접 가서 보면 확인된다. 신도뿐 아니다. 현재 조계종 3,600여 개의 사찰 중 주지 없는 곳이 414곳이다. 한국불교 대표종단인 조계종의 구족계 수계자가 2005년 467명에서 2024년에 78명으로 감소했다. 개신교, 천주교의 통계도 개신교 학자가 “급하게 빠진 것은 젊은 층이고, 늘고 있는 것은 노인들. 한국 교회는 어르신들의 놀이터”라고 한탄하듯 다를 바 없다. 삶에서 에너지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삶의 무의미와 허무성을 강조하며 물질세계로 뛰어들거나, 그들만의 닫힌 공동체로 도피하며 자기 구원에 골몰했다. 때론 온갖 심리 치료의 명상과 힐링 센터에서 값싼 위로를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가 나에게 왜 필요한가를 묻는 것이다. 제도 종교에서 강조했던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이 깨지는 것이다. 제도 종교의 무기였던 내세의 위협은 힘을 잃었다. 신 없는 종교, 종교 없는 영성, 이런 문장들이 새롭게 일어난다. 종교는 개인화되고 있으며, 제도 종교에 집단으로 모였던 이들은 개별로 조용히 참여하며 흩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무종교인 중 호감도에 있어서 불교(20%)가 타종교(천주교 13%, 개신교 6%)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다(2021년 한국갤럽 ‘한국인 종교 현황’ 조사). 불교의 지식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대중화, 전문화돼 있다. 이는 한문 경전과 초기 경인 니까야의 완역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유튜브를 통한 전문 강연 영상은 경전을 출가자 또는 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언제든지 접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됐다. 이제 불교 매체는 교리 학습 등 불교 교리 습득에 지면이나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게 됐다. 더구나 2020년 이후 나타난 ChatGPT 등 인공지능의 등장은 불교 전달 체계를 단순 정보 전달에서 생성 정보 전달로 변화시키며 대중을 정보 생성의 주체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우리는 곧 ‘AI 붓다’, ‘AI 광덕 스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잡지 불광은 지난 50년 동안 부처님 법을 전하는 길을 걸었다. 길에서 만난 세상은 여전히 불타고 있다. 무명과 갈애는 개인에서 개인으로, 집단에서 집단으로 옮겨간다. 붓다 이후 고통의 본질은 여전하지만, 고통의 형태는 다양하게 변주돼 나타난다. 다르마를 직선적, 평면적으로 전달하는 기능만으로는 괴로움을 덜어줄 수 없다. 더 심도 있는 접근 방법으로 괴로움의 근원에 다가가야 하며, 다양한 해석과 도구로 고통의 뿌리와 그 맥락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개인적 고통, 사회적 고통, 지구적 고통이 어떤 맥락으로 얽혀서 나타나는지, 이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 무엇인지, 지혜로운 사람들과 함께, 찾아내야 한다. 고통에 답하는 잡지로 말이다.
김성동
1인 불교 전문 출판사 어의운하 대표. 월간 「불광」 전 편집장, 조계종 총무원에서 총무팀장으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