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나가는 상상을 해 보자. 외국에 가면 무엇을 해야 할까? 현지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고, 명소를 방문하는 것도 좋다. 혹시라도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까지 생긴다면 금상첨화겠다. 외국에서의 경험이라는 것은 불편함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경이로운 발견의 연속에 더 가깝다. 그 발견들 속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것들을 새롭게 성찰하게 된다. 해외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효과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반드시 직접 가야지만 ‘여행’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필자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책을 읽으면서도 나름대로 소박한 해외여행을 한다. 외국 책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또 눈으로 읽으며 그 책이 떠나온 나라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곤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 비치된 해외 불교 잡지 몇 종을 살펴보면서 ‘소박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 여행도 흥미로웠다. 지금 쓰는 이 글은 여행의 과정에서 본 것과 느낀 것들을 이야기하는 일종의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트라이시클(Tricycle)
처음으로 들춰본 잡지는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불교 잡지인 「트라이시클(Tricycle: The Buddhist Review)」이다. 1991년에 미국에서 창간돼 계간으로 발행되고 있다.
「트라이시클」은 미국의 대안 매체인 유튼 리더(Utne Reader)에서 주관하는 ‘유튼미디어상(Utne Media Award)’을 두 번 수상했다. 유튼 리더가 설명한 「트라이시클」의 선정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91년 설립된 이래로 「트라이시클」은 서양 불교도들에게 등대가 됐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영적 구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지난해 「트라이시클」의 지면은 중독에서 노화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주제를 다뤘고, 널리 받아들여진 역사적 붓다의 개념에 도전했으며, 불교로 이어지지 않은 영적 탐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려움과 불확실성에 대한 이러한 개방성은 이 잡지가 천명하는 바를 그대로 실천해 내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
쓱 훑어보니 흥미로운 글들이 보인다. 환경·반핵·인권 운동가인 리베카 솔닛(Rebeca Solnit)과의 대담, 자애·연민·비폭력 등의 불교적 가치는 개인적 수행이라는 차원에서만 실현돼서는 안 되며, 정치적·사회적 실천이라는 차원에서도 실현돼야 함을 이야기하는 글, 티베트 불교의 사유와 흑인 해방 운동의 유산에 입각해 보살의 이념을 사회 진보 이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논하는 글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글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한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불교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불교 잡지에도 이런 종류의 문제의식을 갖춘 글들이 보인다. 그런데 필자는 그러한 글들에서 크게 감동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대개 그런 글들은 원만한 가치를 원만한 방법으로 실현해 나가자는 것이 요지였기 때문이다. 그런 ‘원만한’ 글들은 뜬구름 잡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그에 비해 「트라이시클」에 게재된 글들은 더 치열하고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신행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담론으로서의 불교
「트라이시클」은 쉽고 가벼운 글들도 포함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던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모색하는 다분히 논쟁적인 글들, 그리고 적어도 ‘주례사 비평’은 아닌 진지한 리뷰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잡지 앞머리에 나오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the Editor)’ 코너도 흥미롭다. 이 코너에는 독자들이 편집자에게 쓴 글들이 소개되는데, 잡지 내용과 관련해 비판을 전개하는 글에 대해서는 편집자의 항변 내지는 반박이 답장 형식으로 같이 소개된다. 이런 면면들 덕분에 「트라이시클」은 다소 진지한 매체로 느껴진다.
「트라이시클」이 이런 분위기를 갖게 된 것은 불교를 신행의 차원이 아니라 담론의 차원에서 다루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왜 이런 접근 방식을 취하게 됐을까? 「트라이시클」이 제공하는 정보에 따르면 이 잡지의 독자 가운데 57%가 불교 신자이지만, 43%는 불교 신자가 아니라고 한다. 불교 잡지라고는 하지만 그 독자들 가운데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비중이 무척 높다. 「트라이시클」의 방향성은 이러한 독자 구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불교 신자인 독자들도 그럴 수 있겠지만 특히 불교 신자가 아닌 독자들은 불교 신행이 아니라 불교 담론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다.
불교에서 새 길을 찾으려는 노력
「트라이시클」의 방향성은 불교에 대해 미국 사람들이 가진 인상이나 기대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한 것 같다. 한국에서 불교는 선택 가능한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이기 이전에 문화적 전통의 일부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불교를 일단 뭔가 오래된 것, 오늘날의 현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미국과 같은 서구 사회에서 불교는 그들의 문화적 전통의 일부가 아니며 선택 가능한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아마도 서구인들은 그들 사회에서 쇠퇴해 가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안으로 불교를 인식하는 것 같다. 서구 사회에서 불교는 뭔가 새로운 종교라는 이미지를 가진 듯하며, 불교에 대한 논의 역시 제로 베이스에서 도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미국에서 불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새롭게 획득한 불교라는 가르침을 현대 사회의 현실에 적용해 보려는 여러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트라이시클」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관심사에 부응하는 잡지다.
눈으로도 느껴지는 잡지의 성격
「트라이시클」의 내지는 깔끔한 모범생 같은 느낌을 준다. 화려하거나 아기자기한 느낌은 없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잘 다듬어놓았고 전체적으로 차분한 톤을 구현한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재미는 없지만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운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지 편집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분위기는 「트라이시클」이 유지하는 불교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트라이시클」에서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표지다. 「트라이시클」은 불상 이미지를 표지 이미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불상 이미지들이 상당히 흥미롭다. 「트라이시클」은 현대 미술작품을 연상시키는 무척이나 새로운 방식으로, 때로는 추상적인 방식으로 재해석된 불상 이미지를 표지에 싣는다. 부처님은 때와 장소와 청중에 따라 항상 내용을 달리해 설법했다고 하는데, 「트라이시클」의 표지를 장식하는 창의적인 불상 이미지는 현대 사회에서 불교의 가르침 역시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이 잡지가 불교에 대해 가진 개방적인 태도를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라이언스 로어(Lion's Roar)
「트라이시클」 외에 또 유명한 잡지로는 「라이언스 로어(Lion's Roar)」를 들 수 있다. 1993년에 창간된 「라이언스 로어」는 격월간으로 발간된다. 2012년 자료 기준으로는 발행 부수가 8만 부라고 한다.
「라이언스 로어」는 2007년에 유튼 리더에서 주관하는 ‘독립언론상(Independent Press Awards)’을 수상했다. 이 당시에는 제호가 「라이언스 로어」가 아니라 「샴발라 썬(Shambala Sun)」이었다. 이 당시 「샴발라 썬」에 대한 유튼 리더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올해의 수상 잡지 「샴발라 썬」을 발행하는 ‘샴발라 썬 재단(Shambhala Sun Foundation)’의 명시적 목표는 ‘불교가 서구에 뿌리를 내리는 것에 발맞춰 참된 불교적 가르침이 성장 및 발전하는 것을 촉진’하고, ‘지혜와 신성함과 연민의 가치를 공유하는 모든 사람과 협력하는 동시에 또한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샴발라 썬」은 이 영성 브랜드가 갖는 비영리적 목표에 부응하는 한편, 교조적인 교육 지침이기보다는 문화적 호기심을 갖고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의 관심사에 잘 부합하는 안내서로서 기능하고 있다.”
살짝 캐주얼한 첫인상
외양에서 느껴지는 첫인상은 「트라이시클」에 비해 ‘캐주얼’한 느낌이다. 일단 표지와 내지 디자인에서 그런 느낌을 준다. 또 「트라이시클」이 눈길을 확 끄는 퀄리티 있는 사진과 일러스트를 종종 쓰는 반면, 「라이언스 로어」는 그보다는 좀 더 친근한 느낌의 사진과 일러스트를 많이 쓰는 편이다. 책상에 똑바로 앉아 읽을 잡지를 고르라면 「트라이시클」이 괜찮겠지만, 전철을 타고 가면서 읽을 잡지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라이언스 로어」에 손이 갈 것 같다.
스님이나 사찰 이전에 개인을 보다
「라이언스 로어」는 거창한 주제보다는 개인적인 주제에 상대적으로 더 관심이 있는 느낌이다. 이것은 각호의 커버스토리에서도 드러난다. 2024년 9월호의 커버스토리는 ‘마음챙김과 함께 더 깊이 들어가기’, 7월호는 ‘달라이 라마’, 5월호는 ‘변화를 가져오는 다섯 가지 수행’, 3월호는 ‘당신의 욕정, 당신의 길’이니, 이를 통해 이 잡지의 주된 관심사가 불교의 어떤 차원에 있는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라이언스 로어」에서도 서구 불교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를테면 사찰이나 스님은 한국에서는 익숙하게 여겨지지만 서구에서는 그만큼 익숙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라이언스 로어」는 스님들을 필자로 등장시키기도 하고 몇몇 유명 스님들의 가르침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잡지의 큰 비중을 스님들에게 내주지는 않는다. 「라이언스 로어」가 다루는 불교는 사찰이나 스님이 중심이 되는 불교가 아니라 개인이 중심이 되는 불교에 가깝다. 따라서 「라이언스 로어」는 개인이 일상생활 속에서 부담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수행, 이를테면 명상 등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 보니 「라이언스 로어」는 불교가 주인공인 잡지가 아니라 명상이 주인공이고 불교는 배경인 잡지 같은 느낌을 준다.
‘SBNR’ 시대의 잡지
요즘 ‘SBNR’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Spiritual But Non Religious’, 즉 ‘영적이기는 하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에는 관심이 있지만 교회에 나갈 생각은 없는 사람들, 해탈과 깨달음에는 관심이 있지만 절에 다닐 생각은 없는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다. 이런 흐름은 특정한 종단을 중심으로 하는 교권적 체계로서의 종교에는 위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본래적 의미로서의 종교, 즉 인간의 의문과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응답으로서의 종교에는 SBNR로 대표되는 흐름이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이언스 로어」는 불교 잡지라고 하기에는 다소 불교 색채가 약하다. 하지만 SBNR들이 생각하는 불교란 「라이언스 로어」가 그려내는 불교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미래의 불교를 구체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라이언스 로어」는 SBNR들과 함께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大乗(대승)」
「대승(大乗)」은 일본 정토진종에서 발간하는 월간지다. 종단에서 발간하는 매체이니만큼 잡지라기보다는 사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긴 하다.
잡지라고 하기에는 수수한 느낌
「대승」은 전반적으로 수수하다. 만듦새도 디자인도 별로 인상적이지 않다. 375엔(한화로 약 3,400원)이라는 가격이 매겨져 있긴 하지만 돈을 주고 사기에는 뭔가 아쉽다. 「대승」을 발간하는 일본 정토진종이 이 잡지를 통해 바라는 바는 약간이나마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종단 커뮤니티의 활성화를 돕는 정도인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 잡지가 갖는 사보로서의 성격은 정토진종의 가르침을 소개하는 글, 정토진종 승려 및 신도의 에세이, 독자 참여 코너, 약간의 정토진종 관련 소식 등으로 이뤄진 전체적인 구성에서도 느껴졌다. 여러모로 보아 「대승」은 프로페셔널한 잡지라기보다는 아마추어 사보라고 보는 편이 역시 적당할 것 같았다.
의외로 읽을 만한 내용
하지만 에세이에 해당하는 글들이 의외로 읽을 만했다. 대개 쉽고 짧고 부드러운 글들이었지만 나름대로 어떤 통찰을 품고 있었다. 이것도 읽을 만하고 저것도 읽을 만하고…… 또 뭐가 더 있으려나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니,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아까 읽었던 에세이를 곱씹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읽을 때는 막연히 ‘오호~’ 하고 넘어갔던 에세이들이 은근히 마음에 여운을 남기고 있던 것이다.
이 잡지의 에세이들에 담긴 통찰은 불교의 여러 개념을 동원한 사유를 통해 얻은 거창한 통찰이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경험들을 고운 체로 걸러서 자연스럽게 얻어낸 통찰이다. 얼핏 보기에 별것 아닌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 경험을 유심히 관찰하고 또 그 의미를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분명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잡지의 글들은 보여준다. 소박하긴 하나마 그 통찰들은 일상의 구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갖게 됐고, 또 그 통찰들은 그러한 생명력에 힘입어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것 같다.
슬픔과 고통을 응시하는 잡지
삶에서 겪게 되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차분히 바라보면서 음미하는 태도다. 이때 우리는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둘째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혐오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태도다. 이때 우리는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은 어떠한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채 언제까지나 슬픔과 고통 그 자체로만 남게 된다.
인간의 삶에는 기쁘고 행복한 면도 있지만 슬프고 고통스러운 면도 있다. 우리는 항상 전자를 갈구하고 후자는 애써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삶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는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까지 끌어안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만약에 우리가 슬픔과 고통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부터 뭔가를 배우고 깨닫는 경지에 이른다면 우리는 이를 통해 어떤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구원은 먼 미래에 오신다는 미륵보살님을 기다릴 것도 없고 언젠가는 재림하신다는 예수님을 기다릴 것도 없이,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구원일 것이다.
이 잡지에 실린 에세이들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불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주목한다. 설혹 그 사람들이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러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슬픔과 고통 또한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음을 은은하게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대승」은 의외로 독특하고 의미 있는 잡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매체’ 월간 「불광」
해외 불교 잡지를 구경하는 ‘소박한 해외여행’을 통해, ‘잡지’라고 하는 익숙한 대상을 새삼스럽게 성찰해 봤다.
잡지란 무엇일까? 한자 뜻을 새겨보면 ‘잡다한[雜] 기록[誌]’이 된다. 잡지는 한 권 안에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접근 방식을 모두 아우르기 때문에 ‘잡다’하다. 단행본이 하나의 주제를 한 가지 접근 방식으로 다루는 점을 상기해 보면 잡지의 이러한 ‘잡다’함은 잡지를 단행본과 구분시켜 주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잡지는 이러한 ‘잡다’함에 힘입어 단행본에 비해 더 입체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일본 작가 나카 간스케가 쓴 『은수저(銀の匙)』라는 소설이 있다. 일본의 문호인 나쓰메 소세키는 이 작품을 “일본 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내용은 저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전부다. 겨우 그 정도의 내용에 불과한 소설이 어떻게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이 소설에서 작가는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의 작가가 본 도쿄 간다 지역의 축제 풍경, 소꿉친구였던 소녀 케이가 가져왔던 헝겊 공기, 공기놀이할 때 달아오르곤 하던 케이의 귓불, 초라한 노파가 열심히 만들어 좌판에 올려놓았지만 누구도 사가지 않던 떡, 방안에서 타오르던 기름등잔 등등이 빛을 받은 유리구슬처럼 맑고 투명하게 그려진다.
나카 간스케가 『은수저』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하나하나 떼놓고 보면 별로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 모든 ‘잡다’한 것들이 한데 모여 작가의 어린 시절이라는 세계를 생생하다 못해 압도적이기까지 한 현실감으로 되살려낸다. 이 소설을 뛰어난 작품으로 만든 것은 아마도 이러한 종류의 현실감에서 비롯된 어떤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은수저』가 가진 이러한 장점은 잡지 역시 갖고 있다. 『은수저』가 그렇듯 잡지 역시 근본적으로 ‘잡다’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은수저』가 “일본 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처럼, 잡지 역시 “출판문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매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잡지가 ‘아름다운 매체’가 될 수 있는 예로 월간 「불광」을 꼽을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정말 근사한 일이 되겠다.
권순범
동국대 강사. 불교 개론 수업과 고전 세미나 수업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