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나, 진짜 나일까] 일그러진 거울, 일그러진 얼굴
상태바
[거울 속 나, 진짜 나일까] 일그러진 거울, 일그러진 얼굴
  • 강애경
  • 승인 2024.09.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울과 자화상

플라톤의 예술 모방론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본질을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며 예술가는 그저 모방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어디서 한 번쯤 들어본 듯 아련한 침상의 비유를 떠올리면 플라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목수는 ‘진실로 있는 것’을 본(本)떠 침대를 만들고, 화가는 그 ‘보이는 침대’를 모방해 침대를 그린다. 침대를 그리는 행위는 거울로 상을 비추는 것과 다름없다. 누구나 “거울을 들고서 어디고 돌아다니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것은 왜곡된 진실에 불과하다는 것이 플라톤이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러한 모방 행위는 진리에서 세 번째 것(① 본 → ② 침대 → ③ 그림)으로 착시를 일으킨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매혹적이기에 인간은 불완전한 상에 다름 아닌 모방한 것들을 통해 세상을 보며, 허황한 것이 진리라고 믿는 혼란 속에 매몰된다. 그렇기에 플라톤에게 있어 예술가는 진실을 왜곡시켜 혼란을 야기하는 불순분자가 된다. 이로써 예술가는 국가에서 추방돼야 할 부류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진지하지 못한 것을 양산해 내는 자’라고 평가 내린 예술가는 자신이 가진 거울로 세상을 비추기만 했을까? 아니다. 미리 말하자면 그들은 스스로를 비추며 자기 안에 깃든 세계를 읽어냈다. 

거울에 반사된 세계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시각적 정보를 전달한다.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에 반영된 세계 역시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반영에 그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일정한 필터에 걸러진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사고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양 미학사에서 플라톤이 틔워준 예술 모방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서양 미학사에서 되풀이되는 ‘가상(그림)’과 ‘진리(본)’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과 가상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관점이 그것인데, 전자가 앞에서 살펴본 플라톤적 시각이라면 후자는 예술을 변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변이다. 

가상과 진리라는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이후 예술의 미학적 위상에 대한 설전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됐다. 예술이 진리를 모방하고자 했으나 ‘가짜 상에 불과해 떨쳐 내야 하는 것’에서, ‘새로운 형상을 창조한 행위’로 격상하기까지 긴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설전이 오가야 했다. 미술 비평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신은 최초의 예술가’라는 찬미를 바치며 예술가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를 불러온다.

 

자기 자신을 그린다는 것

초상화(Portrait)의 어원을 쫓아가면 라틴어 ‘Protrahere’를 만나게 되는데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발견하다’, ‘끌어내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 자기 자신을 뜻하는 ‘self’가 붙어 자화상(self-portrait)이라는 단어가 완성된다. 즉, 자화상이란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내는 그림이다. 

자기 자신을 그린다는 것은 무척 쉬운 일처럼 보인다. 금전적 어려움이나 여타의 사정으로 모델을 구하기 어려울 때 자기 자신을 그린다면 이보다 더 간편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긴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전에는 개인을 대상화한다는 생각이 아주 희소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머릿속에는 신이 가득했고 재현의 대상은 신화나 기독교적인 것으로, 감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에 국한돼 있었다. ‘신과 인간’과 ‘영혼과 육체’의 시소 타기에서 오직 신과 영혼을 향하던 무게추가 가시적 세계와 감각으로 기울어지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개인의 권리가 확보되고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시적인 것들의 존엄성이 발견됐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던 숭배가 오감을 통해 물질세계를 재편하면서 인식의 획기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14세기 이후 근대적 신앙심에서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신이 임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교리 해석을 통해 ‘개인’이 권리를 찾게 됐다. 비가시적인 것만큼이나 가시적이고 감각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는 해석은 관찰자의 주관적 시선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면서 ‘개인’이 탄생하도록 하는 축포로 작용한다. 

이로써 회화에 인간의 시지각을 통해 포착되는 시간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다양한 이미지가 그려지게 된다. 계절의 변화와 인간의 노화에 대한 묘사가 영원성과 대비되며 회화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후 영원한 것, 일반적인 것이 아닌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에 대한 관심은 개인에 대한 묘사에 이어 원근법적 재현으로 나아가며 주체화된 개인으로서의 화가가 등장한다. 

세계를 변형시키는 주체적 관점을 지닌 화가의 등장은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르놀피니의 결혼>(1434)[도판 1]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신랑과 신부가 엄숙하게 맹세하는 장면을 담은 이 작품에서 우리는 거울을 발견할 수 있다. 

[도판 1] 얀 반 아이크, <아르놀피니의 결혼>, 1434년, 영국박물관 소장

그림 뒤편의 볼록거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푸른색 옷을 입고 문간에 서 있는 이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사람이 화가 반 아이크다. 이를 확신할 수 있도록 거울 위에는 라틴어로 “얀 반 아이크 여기에 있었노라”라고 쓰여 있다. 카메라 오브스쿠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 기법으로 그려진 이 작품에서 신의 눈을 상징하는 거울을 통해 화가의 시선이 원근법의 축이 되도록 함으로써 (신의 시선이 아닌) 주관적 시선에서 그려진 개별성을 지닌 작품이 탄생하게 됐다. 신의 눈을 대신한 인간의 시선은 이후 무엇을 봤을까.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자아와 세계

인류가 만들어 낸 사유의 역사를 기반으로 들여다보자면, 회화는 15세기에 개인의 탄생을 고지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신을 향한 갈망이 개인으로 소급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자화상으로 표현됐다. 이러한 현상을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자화상>(1500)[도판 2]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도판 2]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500년, 독일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소장 

뒤러의 자화상은 무척 사실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인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어떤 위화감도 느낄 수 없다. 준수한 사내가 장엄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어떤 왜곡이나 변형의 기미를 알아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그림에서 오히려 놀라움을 느껴야만 한다.

사실 자화상은 거울 제작의 변천사와 궤적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뒤러가 활동할 당시 거울은 제작상의 어려움으로 볼록거울이 대부분이었다. 알다시피 볼록거울은 비치는 상을 왜곡시켜 보여준다. 따라서 볼록거울을 바라보며 자화상을 그렸을 뒤러는 인체의 비율을 알맞게 그려내는 데 큰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즉,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세계를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대상을 다시 변형시켜 가시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자화상을 단순히 거울에 비친 상을 재현하는 것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자화상이란 ‘화가가 자기 얼굴을 그렸다’기 보다는 ‘화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자기 얼굴로 표현했다’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한편, 17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그려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작품 <시녀들>(1656)[도판 3]을 감상해 보자. 

[도판 3]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년,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작품의 중앙쯤 거울이 있고 그곳에 두 명의 인물이 비치고 있는 구성이 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그곳에 있는 것은 화가 자신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대상은 왕과 왕비다. 벨라스케스 자신은 캔버스 옆에서 붓을 들고 서 있다. 이로써 그림을 보는 감상자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보다 더욱 크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화가가 공간을 지휘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림 속 화가의 시선이 바로 우리를 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폭에 그려지고 있는 것은 왕 부부일까, 공주일까? 구성상 작은 거울에 비친 왕 부부가 모델일 것이라는 주장과 공주 앞쪽에 거대한 거울이 있어서 그 거울을 보며 공주를 그리고 있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그리느냐가 아니다. 이 화폭에는 상반되는 것-빛과 어둠, 상류층과 하류층, 어른과 아이, 인간과 동물,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들이 한 화폭 안에 담겨 있다. 대립하는 다양한 실체가 공존함으로써 감상자의 시선이 분산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17세기 사람들의 사상 일부분을 드러낸다. 즉 이상주의에 대한 믿음의 상실, 세상에 유일한 것은 없다는 환멸감, 세월의 덧없음에 대한 인식이 퍼지면서 관점에 따라 상황이 반전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벨라스케스는 화폭 안 거울 속에 자신을 가두지도, 경건함으로 무장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자화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함으로써 화가의 관점으로 세상을 재구성하고 더 나아가 전통적 가치 규범이 아닌 당대에 움터 오른 새로운 사상적 일면을 포착해 가시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일그러지고 분열된 세계 안의 자화상

앞서서 우리는 화가들이 화폭에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살펴봄으로써 자화상이 그저 대상의 면밀한 복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인식한 세계와 새롭게 정립되는 사상을 드러내는 한 표현 양식임을 살펴봤다. 

17세기 이후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자화상은 더욱 적극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같은 화가가 그린 일그러진 신체로 표현되는 자화상에는 분열된 세계 속에 현존하는 인간의 고뇌와 고통이 전시된다. 

이는 자화상이 거울의 발명과 내밀한 관련성을 갖듯, 사진기의 등장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1840년대 이후 사진 기술이 발전하면서 누구나 사진기만 있다면 보이는 대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또한 신을 향해 소급되는 진리의 일원론으로부터 먼 여정을 떠나온 인류는 이제 개인이 지닌 고통의 원천을 스스로 파헤치고 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사유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자화상 또한 변화의 물결을 타게 된다. 사진을 찍는 것으로 쉽사리 해낼 수 있는,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작품 안에 화가의 세계관과 자의식을 녹여내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에곤 실레의 <서 있는 자화상>(1910)[도판 4]은 그의 100여 점의 자화상 중 단연 눈에 띈다. 일그러진 얼굴, 깡마른 몸, 부자연스러운 몸짓, 거무죽죽한 피부색은 그림 속 인물이 병들고 괴로워 보이도록 한다. 뼈가 도드라진 앙상한 몸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며 드러내는 자화상을 통해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프랜시스 베이컨 또한 무수히 많은 자화상을 그려냈다. 정육점의 고깃덩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는 자화상에서 일그러지고 뭉개진 얼굴을 과감하게 드러냄으로써 피부와 살점이 폭행의 결과로 부어오른 듯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도판 5]. 

[도판 4] 에곤 실레, <서 있는 자화상>, 1910년, 오스트리아 알베르티나 미술관 소장
[도판 5] 프랜시스 베이컨, <상처 입은 눈을 가진 자화상>, 1972년 

두 화가의 자화상들은 시각적 이미지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 내면의 고통과 욕망이라는 압출을 겪은 기괴한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일그러지고 분열된 세계 안에 거주하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으로 제시한다. 

 

대상-지평과 인드라망의 세계

지금까지 미학사의 논쟁으로부터 출발해 자화상의 변천사를 간단하게 살펴봤다. 정신없이 달려와 간소하게 여겨지는 이야기지만 우리를 두고두고 사유하도록 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자화상은 세계와 인간 사이의 끊을 수 없는 관계성의 섬세한 결을 좇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몸과 세계가 분리돼 있지 않으며 하나의 대상은 각각의 다른 대상들의 거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몸과 세계 그리고 타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분리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더불어 살아가며 진동을 주고받음으로써 몸의 공감각은 공간을 넘어서 대상을 우리가 지각하는 동시에 반응하도록 하여 세계를 투사하고 확장한다. 대상과 세계가 그물코 구조로 짜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이다. 

퐁티의 대상-지평 개념을 인도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김영진은 고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인드라망으로 설명한다. 인드라 신의 하늘궁전에 있는 그물망은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매듭마다 사방을 비추는 보석이 매달려 있어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바라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들은 그 안의 세계를 담아내며, 감상자는 세계를 비추는 각양각색의 자화상들을 통해 세계 인식에 이름과 동시에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와 마주하게 되는 모습을 말이다. 

 

강애경
전남대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