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수행자, 묘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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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수행자, 묘엄 스님
  • 월조 효신 스님
  • 승인 2024.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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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스님들의 수행과 사상

 

‘파계의 씨’

‘어질다’, 이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세주 묘엄(世主妙嚴, 1931~2011) 스님이다. 선(禪)과 교(敎)를 아우른 비구니 교육자였고, 차별받은 한국 비구니의 인권과 비구니 교단을 새로 확립한 혁명가였다. 비구・비구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묘엄 스님을 아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평하는 한마디가 바로 “참 어진 스님”이다. 묘엄 스님의 참선 수행은 교학을 지탱하는 자신의 밑거름이었기에, 주위 사람들은 일상에서 “선정의 마음을 풀어낸” 스님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따사롭고 어진 성품과 달리 그의 탄생과 삶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아픔의 상처와 한국 불교계의 난점들이 뒤엉킨 흔적이다. 그 존재 자체가 격동의 시대적 아픔이 오롯이 담긴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인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배경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읽어낼 수도 있지만, 개인의 삶이 그와 함께한 시대를 서술해 주기도 한다. 묘엄 스님은 후자에 해당한다. 

묘엄 스님은 청담 스님의 딸로 청담 스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파계의 씨’, 그 결과물이다. 부친인 청담 스님이 출가할 당시 결혼한 몸으로 딸(인자)을 두고 있었다. 아들의 출가에 그의 부친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편의 길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던 순종적인 아내는 이혼 절차를 밟아준 후 시어머니를 모시며 고된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다. 시어머니의 구박은 남편을 붙잡지 않고 이혼을 해줌으로써 아들을 산으로 보내버린 며느리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당시에는 아들 선호 사상의 유교적 관념과 스님들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강하게 존재했다. 출가하는 이들은 가난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거나 개인적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불심이 깊은 불자라도 절에 있는 스님은 존경하되 본인의 자녀가 스님이 되는 것은 결사반대했다. 청담 스님도 여기에 해당한다. 

청담 스님(앞줄 가운데)과 묘엄 스님(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이 함께한 1961년 동학사 강원 제4회 졸업식 모습, 사진 봉녕사 제공

‘집안의 대를 잇게 해야 한다’라는 집념의 어머니는 스님인 아들을 찾아가 장삼 자락을 잡고 눈물 흘리며 애걸했고, 그 아들은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기로 마음먹게 된다. 어머니와 함께 옛집으로 가 부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됐고, 그 파계의 씨는 기대와는 달리 아들이 아닌 딸(인순)로 태어났다. 바로 묘엄 스님이다. 청담 스님은 하룻밤의 파계 이후 철저한 참선 수행과 오랜 기간 스스로에게 육체적 고통을 주는 혹독한 참회 정진을 하며 죄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담 스님의 하룻밤 사건이 조용히 지나간 점은 이 당시 근대 한국불교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고 결혼 후 출가한 비구승들이 많았던 시대적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일제강점기 (1931년 1월 17일) 경남 진주시 수정동 54번지 장새미 골목의 석류나무집에서 그렇게 태어난 딸은 14세에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가 써 준 편지를 들고 스님인 아버지를 찾아가 머리를 깎게 된다. 

 

청담 스님의 딸이자 
성철 스님의 첫 비구니 제자

묘엄 스님은 어린 시절 집에서 우리말은 할 수 있었지만, 한글은 읽거나 쓸 줄 몰랐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창씨개명이 이뤄졌고, 학교에서 오직 일본어만을 사용해야 했고, 조선어(한국어)는 제2외국어이자 사용 금지어에 해당했다.

묘엄 스님의 회고에 의하면, 13세(1944년) 초등학교 때 여자아이에게 ‘성노예(종군위안부)’ 지원서와 함께 군 병원의 간호사와 군수공장 여공의 사진을 보여주며, 고수익 일자리를 구할 좋은 기회라며 자원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묘엄 스님은 서류상 (부모 이혼 후 태어난) 사생아 신분으로 중학교 진학에 불합격 통지를 받게 된다. 이것은 곧 성노예로 끌려가야 함을 의미했다. 조선총독부는 12세에서 40세 사이의 모든 미혼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 일본군 성노예의 80%가 한국인이었는데, 그것은 일본 군인이 성 경험이 없는 일본 및 오키나와 출신을 가장 선호했고, 그다음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더 잔인한 면은 일본에는 처녀를 강간하면 더욱 강해져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미신이 있어 어린 소녀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Iris Chang, 『난징 대학살의 강간』, 1997). 이 사정은 당시 한국 승가에도 예외는 아니라 징집을 피하도록 상좌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비구니승도 있었고, 비구승들은 학도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전쟁 초기 차출 지역이 ‘경상도와 전라도’였던 탓에 딸(묘엄 스님)을 보호하기 위해 어머니는 재빨리 조치를 취해야 했다. 고민 끝에 산중은 안전하리라 여겨 남편(청담 스님)이 있는 문경 사불산 대승사로 딸을 보내 부처님 제자(비구니)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이 일은 묘엄 스님의 일생에서 개인적 전환점이기도 하지만, 한국사에서 일제에 의한 잔혹한 상처의 흔적이다. 

운명이었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편지를 들고 온 꼬맹이의 존재는 훗날 한국 비구니사를 써 내려간 한 편의 서사시가 됐다. 산중에 들어온 후로 묘엄 스님은 늘 ‘첫’ 물꼬를 트며 새로운 승가의 길을 열며 그 삶 자체를 한국 비구니 역사로 엮어 나가게 된다.  

편지를 들고 온 어린 여자아이에게 (부인의 바람대로) 청담 스님과 도반 성철 스님은 출가를 권했으나, 아이는 딱 잘라 거절했다. “나는 여자 중은 안 될 겁니더. 여자 중은 설법도 못 하고, 빨간 옷(가사)도 안 입고, 맨날 밥하는 일만 하고, 욕질하며 막 대하는 걸 봤어예. 절대 중은 안 될 겁니더.” 그러자 성철 스님이 “니가 비구니가 되어 잘해서 비구니계에 혁명을 일으켜서 큰 중이 되면 안 되나. 내가 아는 거는 죄다 니한테 가르쳐 줄게” 하며 꼬시자, “그라믄 꼭 지를 법사중(법사 스님)으로 만들어 주이소”라며 성철 스님에게 꼬맹이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꼬맹이는 대승사 근처 비구니 절인 윤필암의 월혜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삭발했다. 성철 스님은 『화엄경』의 「세주묘엄품」에서 딴, 묘엄이라는 법명과 함께 “나는 법상에 오르지 않는 사람인데 청담 스님 딸이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미니계를 설해” 줬다.

청담 스님의 딸이자 성철 스님의 첫 비구니 제자인 묘엄 스님의 탄생이다. 청담, 성철이라는 두 비구 스님의 존함만으로 이미 절집(특히 비구니) 사회에서는 근접할 수 없는 권력(배경)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묘엄 스님은 그 권력을 전혀 사용하지도, 드러내지도 않았다. 어쩌면 본인의 회고처럼 “여자들 속에서 자라서, 아버지의 존재와 역할을 전혀 몰랐기에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 처음 본 아버지를 향해 ‘저 중’이라 칭하는 해맑음이 있었을 것이다.

대승사에서 홍경 노스님이 윤필암에서 지내다 온 묘엄 스님에게 “아가, 윤필암 생활이 지낼 만하더냐?”라고 묻자, 늘 주위의 모함으로 서러움이 많았던 꼬맹이는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자 함께 있던 청담 스님이 묘엄 스님의 뺨을 세차게 때리며 “비구니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비구에게 와서 고자질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 장면에서 두 가지를 읽을 수 있다. 묘엄 스님은 청담과 성철이라는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묵묵히 지냈기에 끊임없는 주위의 질시로 곤란을 겪은 것이고, 청담 스님은 딸의 투정이 혹여 허물로 굳어질까 끝없는 인욕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각자의 은사마저 눈치를 보게 만든, 큰스님을 부친으로 둔 (소위 권력자의 딸이었던) 여타의 비구니 스님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묘엄 스님과 함께 시절을 보낸 비구・비구니 스님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성품은 훈련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친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은 천성이었다고 한다.

 

첫걸음이 바로 목적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윤필암의 비구니 스님들도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묘엄 스님은 당시 부산의 인심은 모든 피난민에게 너그러워 본인들의 방을 기꺼이 피난민들에게 내주며 방세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마당에 구덩이를 파서 동굴처럼 이용해 그곳에서 지낸 피난민도 상당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운허 스님을 따라간 양산 통도사에서 본격적인 율학과 경학을 배우게 된다. 이미 자운 스님에게 율장을 배웠으나, 운허 스님 밑에서 체계적인 율장과 경학을 배워, 공식적인 강사 자격을 취득한 한국불교의 최초의 비구니 강사(1957년)가 됐다. 이때 통도사에는 지관, 월운 스님 등 비구 학인 20여 명이 함께 있었다. 이 비구 학인승들을 통해 묘엄 스님에 대한 평(칭찬)이 널리 곳곳의 절집으로 퍼지기도 했다. 

그 이듬해(1958년), 자운 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게 됐다. 사미니계를 받은 지 16년 후였다. 그만큼 비구니들은 정당한 구족계를 받지 못한 채 사미니(예비승)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불평등한 삶을 몸소 겪은 묘엄 스님은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사가 됐고, 독립된 비구니 이부승구족계 수계제도가 부활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자운 율사(앞줄 정중앙)와 묘엄 스님(자운 율사의 왼쪽), 사진 봉녕사 제공

그러나 또다시 수계식을 둘러싸고 비구니를 향한 비구들의 억압 논리가 진행되자 그들에게 맞서 비구니 계사직을 사임한 후, 한국 최초의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을 개원했다. 이는 비구니 독립권을 회복해 비구와의 평등성을 확보하는 대안이었다. 또한 1981년, 전국비구니회에서 서울 성라암에 한국비구니대학을 개설하고, 그 학장을 스님이 역임하면서 실질적인 비구니대학을 세우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그러나 파벌을 만드는 내부 비구니회원들 속에서 그 일이 얼마나 헛된 꿈인지를 깨닫고 사임하기에 이른다. 이 일로 재학 중이던 비구니승은 비구승들만 다니던 중앙승가대학으로 전학하게 됐고, 오늘날의 통합 중앙승가대학이 됐다.

묘엄 스님은 (1966년) 청도 운문사로 내려가 비구니 강백이 운영하는 최초의 비구니 강원을 개설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어려운 형편의 운문사 살림 재정확보와 40명에 불과했던 학인들을 100여 명에 이르는 강원을 만든 후 미련 없이 운문사 강주 자리를 내놓고, 1971년 수원으로 와 다시 봉녕사 강원을 개원하게 된다.  

성철 스님을 통해 처음부터 참선 공부를 익혔던 스님은 그 공부를 놓치지 않고 경학과 병행했다. 봉암사에서 참선 수행에 매진하던 시절은 스님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고, 제자에게 더러 “누더기를 입어도 정신은 살아있던 봉암사 시절이 가장 중답게 살던 시절이야, 요즘 중노릇하는 애들은 좋은 환경 속에서도 진심을 내지 않고 방일해”라며 경책했다.

스님은 “불교는 궁극적으로 마음을 깨치는 데 목적이 있음”을 늘 강조했다. “부처님 법을 배우다 보면 원력(願力)이 생기는데, 여기서 자기의 마음을 바로 쓸 줄 아는 지혜가 나옵니다. 성불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거죠”라며, “인생은 순환도로 같은 거로, 출발지가 바로 목적지입니다. 출발과 도착이 따로 있지를 않아요. 첫걸음이 바로 목적지인 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2011년 겨울(12월 2일) 봉녕사에서 긴 여정을 마치며 스님은 짧은 임종 유훈을 남겼다. 법납 67년, 세수 80세였다. 

“마음공부는 상대적인 부처님을 뵙고
절대적인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
자기를 단속하여 인천의 사표가 되고
생사에 자재하여 중생을 제도하라.”

스님이 남긴 유훈은 어진 성품으로 한평생 불모지였던 길을 개간한 교육자이자 혁명가이자, 참선 수행자였던 당신의 모습 그대로다. 

 

월조 효신 스님
동국대 강사, 철학과 국어학 그리고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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